[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8)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미당

이 나라 모국어의 꽃밭은 눈이 부시다. 신라 향가로부터 큰 물살로 뻗어온 시의 장강에 나를 겁없이 뛰어들게 한 스승은 미당 서정주 선생이었다. 소설을 쓰겠다고 잔뜩 벼르고 문예창작과를 지망한 나는 '서정주 시선'을 펴들면서부터 나도 모르게 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미당 선생은 시 창작 첫 시간에 시를 써오라고 과제를 내주셨고 그 과제물을 대상으로 작품평을 하실 때 내가 쓴 '창과 꽃밭'을 들고 나오셨다. 이미 등단했거나 등단 문턱을 넘어서는 강적(!)들을 뒤로 하고 무명의 내 작품이 먼저 올라온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내 작품이 그중 뛰어나서가 아니라 어쩌다 손에 잡혀서 일 수도 있는데, 그 우연은 내게 어떤 필연으로 작용해서 나는 끝내 소설가가 되지 못하고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미당 선생 댁은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있었다. 담장도 대문도 없이 안마당은 바로 꽃밭이었고 그 사잇길로 유리창 미닫이를 열고 들어서면 선생의 사랑방이다. 그 사랑방은 시도 때도 없이 붐비고 있었다.

시를 들고 찾아오는 제자들이나 시 지망생뿐 아니라 시인.소설가.평론가 등 명동에 드나드는 사람들 중 많은 이가 미당 댁에 찾아가서 술과 밥을 축내는 일이 예사였다. 그렇다고 과일 봉지나 술 한 병이라도 사가지고 가는 형편도 아니었다.

대학교수의 월급과 약간의 원고료와 심사료 등의 넉넉지 못한 수입이었을텐데 그런 것은 헤아릴 겨를이 없는 우리들이었다. 누구보다도 애쓰셨을 것은 손님같지 않은 사랑방 손님들을 뒷바라지하느라 있는 반찬 없는 반찬 장만하시는 사모님 방옥숙 여사였다.

미당선생 팔순 잔치가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렸을 때 황동규 시인이 일어나서 외쳤다. "미당 시를 읽지 않고 시를 쓴 사람 나와봐라!"고. 나는 그 말을 받아서 "저 1950~60년대 방옥숙 여사의 술과 밥 안 먹은 사람 나와봐라!"고 말하고 싶다.

그 시대엔 문학의 밤도 많았다. 각 대학, 각 고등학교에서 다투어 시낭송회 등이 열렸다. 우리 반에서도 몇 개의 동아리가 생겼고 '문예창작회'라는 동아리에서 '문학의 밤'을 명동 돌체음악실에서 가졌다. 사회를 맡은 나는 '시성 서정주'라고 미당을 소개했더니 미당은 "내가 제자를 잘못 두어서 근배가 실언을 했다"고 꾸지람을 했다.

신문학 이후 공초.만해.소월.정지용 등 모국어의 새벽을 개척한 시인이 한둘이랴만 나는 미당의 시에 눈이 멀어 있었다. 외려고 한 것도 아닌데 '서정주 시선' 한 권이 저절로 외워질 만큼 낱말 하나 토씨 하나에도 나는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방학 때면 고향 당진에 내려가 여름이면 콩밭을 매면서 시를 썼고 겨울이면 눈밭에 소나무가지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시를 썼다. 노트에 한권도 되고 두권도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것이 못되는 남의 흉내일 터이나 나는 그 노트가 아까웠다. 공부는 된둥만둥하고 친구들은 졸업이다, 다시 진학이다 바쁠 때 나는 원고뭉치를 들고 공덕동 미당댁을 찾았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시집을 내겠다며 서문을 써달라고.

"근배가 시를 나하고 같이 하려 책상을 마주 한 지 벌써 두 해나 된다. 그 동안 그는 시와 정신을 가지고 누구보다도 애쓴 사람 중의 하나였고 또 이 밖의 어느 외도도 하지않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는 미당의 서문을 받아 나는 첫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를 60년 봄에 펴냈다. 미당선생은 그렇게 나의 시의 입산에 머리를 깎아주셨다.

이근배(시인·한국시인협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