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에 미친 음악팬 빈필 지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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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필하모닉은 상임지휘자를 두지 않고 지휘자.레퍼토리.협연자를 단원들 스스로 결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음악적 자존심으로 말하자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이들이 아마추어 지휘자와 음반을 녹음하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까지 보태 1백25명이 출연해 85분간 진땀을 빼는 말러의 교향곡 제2번'부활'을.

지난 주말 빈 필하모닉과 '부활'을 녹음한 주인공은 미국 태생의 길버트 카플란(61). 단 한 곡의 레퍼토리로 세계 무대에서 활약 중인 그는 사상 최초로 빈 필을 지휘한 아마추어라는 기록까지 남겼다. 이들이 녹음한'부활'은 DG레이블로 오는 8월 전세계에 출시된다.

카플란의 직업은 출판업자다. 음악 교육이라곤 어릴 때 엄마 손에 이끌려 피아노 레슨 좀 받은 게 전부다. 일찍부터 증권가에 뛰어든 그는 25세 때 증권 전문지'기관 투자가'(Institution Investor)를 창간했다. 현재 1백40개국에서 15만부 이상 팔리고 있는 증권업계의 필독잡지다.

그가 말러의'부활'에 홀딱 반한 것은 1965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아메리칸 심포니를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말러와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그는 그후 죽음과 부활을 치열하게 묘사한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열병'을 앓았다. 얼마 후 그는 이 교향곡을 직접 지휘해보고 싶은 충동을 실현에 옮긴다.

카플란은 줄리아드 음대 대학원생 찰스 본스타인에게 81년 한해 동안 지휘법 기초를 배운 후 '부활'의 악보 분석을 끝냈다.

그는 이듬해 뉴욕 링컨센터의 에이버리 피셔홀에 대관 신청을 냈다.'깜짝 지휘'로 잡지 창간 15주년 파티를 꾸밀 생각이었다. 아메리칸 심포니도 돈을 주고 빌렸다. 오케스트라에서는 객석을 전석 초대로 채워야 하고 아무도 공연 리뷰를 쓰면 안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약속을 깨고 두 명의 평론가가 호의적인 리뷰를 썼다.

여기 저기서 지휘 요청이 쇄도했다.지금까지 LA 필하모닉.워싱턴 내셔널 심포니 등 50여개의 오케스트라에서 같은 곡을 1백여회 지휘했다. 96년엔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개막 무대에도 섰다. 하지만 다른 곡을 지휘해달라는 부탁은 일절 사절하고 있다.

카플란이 88년 런던 심포니와 녹음한 '부활'(BMG)은 17만5천장이 팔려나갔다. 말러 음반 중 최다 판매 기록이다. 당시 뉴욕 타임스와 독일 ZDF방송은 이 음반을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했다.

카플란은 카네기홀 부이사장을 비롯, 뉴욕 WNYC 방송.런던 사우스뱅크센터.아메리칸 심포니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줄리아드 음대.런던 왕립음악원에 말러 특강을 나간다.

그의 말러 사랑은 그칠 줄 모른다. 카플란 재단을 설립해 교향곡'부활'의 필사본 악보까지 사들였다. 지휘를 하면서 악보에 반영된 작곡자의 의도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1천1백86종에 이르는 말러 음반 목록을 정리했고 말러 사진을 모은 '말러 앨범'을 출간했다.

카플란은 말러가 쓰던 지휘봉으로 무대에 나서고, 그의 아내 레나는 말러가 아내 알마에게 선물한 반지를 끼고 다닌다. 이쯤 되면 아마추어를 '프로페셔널 못지 않은 지식과 열정을 갖춘 애호가'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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