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금리 쇼크] 上. 생애설계가 바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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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그 양만 중요한 게 아니다.바야흐로 ‘돈값’(금리)이 생활을 바꾸는 시대가 됐다.금리가 뚝 떨어지자 돈을 예금하고 빌려쓰는 개인이나 기업뿐만 아니라 돈을 굴리는 금융회사도 야단이다.미처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적지 않다.

젊은 나이에 여러 장의 카드를 돌려쓰며 연명하는 부채인생이 늘어나는가 하면,넉넉한 이자로 등이 다습던 고액 예금자들이 울상이다.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던 금융회사들은 역마진을 걱정하며 새상품을 만들고 대출 세일에 나서고 있다.기업들도 0.1%포인트의 금리차에 운명을 걸어야 할 판이다.

이자에 붙는 세금과 물가상승률을 따지면 남는 게 없는 실질금리 마이너스 시대는 이미 재테크 전략을 바꾸는 차원을 넘어섰다.우리의 생활 형태와 의식은 물론 시장과 산업을 바꾸고 있다.그 현장을 집중 점검한다.

돈은 그 양만 중요한 게 아니다.

바야흐로 '돈값' (금리)이 생활을 바꾸는 시대가 됐다. 금리가 뚝 떨어지자 돈을 예금하고 빌려 쓰는 개인이나 기업뿐만 아니라 돈을 굴리는 금융회사도 야단이다.

미처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적지 않다. 젊은 나이에 여러 장의 카드를 돌려 쓰며 연명하는 부채인생이 늘어나는가 하면, 넉넉한 이자로 등이 다습던 고액 예금자들이 울상이다.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던 금융회사들은 역마진을 걱정하며 새 상품을 만들고 대출 세일에 나서고 있다.

기업들도 0.1%포인트의 금리차에 운명을 걸어야 할 판이다. 이자에 붙는 세금과 물가상승률을 따지면 남는 게 없는 실질금리 마이너스 시대는 이미 재테크 전략을 바꾸는 차원을 넘어섰다. 우리의 생활 형태와 의식은 물론 시장과 산업을 바꾸고 있다. 그 현장을 집중 점검한다.

통신회사에 다니는 閔모(33)씨는 맞벌이하는 부인과 자신의 월급 중 절반을 이자 및 할부대금을 내는 데 쓴다.

최근 경기도 분당의 32평 아파트를 사면서 빌린 6천만원의 대출금 이자와, 할부로 산 1천5백㏄ 승용차와 40인치 프로젝션 TV 등의 할부대금이다. 閔씨는 "얼마 안되는 이자를 벌려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축하느니, 젊을 때 풍요하게 사는 게 낫지 않으냐" 고 말했다.

정기예금 금리가 연 4%대까지 낮아지자 어지간해선 목돈을 만지기 힘들어졌다. 때문에 저축에 신경쓰기보다 우선 돈을 빌려 쓰고 보자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젊은 층 중에는 주택은 물론 자동차와 대형 전자제품을 대출 및 장기 할부로 사고, 소득의 대부분을 이자와 할부대금을 갚는 데 쓰는 '할부 인생' '외상 인생' 이 크게 늘고 있다.

젊은 세대의 이같은 성향에 맞춰 할부금융 업체뿐만 아니라 은행들도 만기 50년짜리 주택담보대출과 오토론.디지털TV대출 등 할부형 대출상품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노년층의 생활 패턴도 달라지고 있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나중 문제고, 당장 생활을 꾸리는 것이 급하다.

금리가 낮아져 여윳돈으로 생활하기 힘들어짐에 따라 웬만한 노년층은 하루하루 재산을 까먹고 있는 실정이다. 40, 50대 중장년층도 퇴직 후 생활이 걱정이다.

푸르덴셜생명 최헌 생활설계사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노후 자금으로 쓰고, 종신보험을 들어 대출금을 갚는 노년층이 늘고 있다" 고 귀띔했다.

처음 겪는 초저금리 상황이 인생 설계까지 바꾸고 있다. 많은 사람이 삶의 최대 좌우명으로 여겨온 저축의 의미가 바래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최근 불고 있는 창업.부업 바람도 초저금리가 불러온 현상 중 하나다.

지난해 초 대기업 부장에서 명예퇴직한 金모(50)씨는 올 3월 서울 강남 사무빌딩가에 편의점을 차렸다.

퇴직금 1억5천만원과 예금을 합쳐 2억5천만원의 현금이 있었지만 이자로는 생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가게를 지켜야 하는 힘든 일" 이라며 가족들이 말렸지만, 몸은 고달파도 1억5천만원을 투자해 월 5백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는 현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

金씨가 가맹한 훼미리마트에는 요즘 하루 평균 15명꼴로 창업 희망자가 찾아온다. 지난해까지 찾아 보기 어려웠던 50대 창업 희망자가 요즘에는 10명 중 한명 꼴이다.

낮아진 대출금리도 창업 열기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경기가 나쁜데도 신설법인 숫자가 늘고 있다.

지난 8월 새로 생긴 법인은 3천3백61개로 1월(2천7백62개)보다 20% 늘었다. 중소기업청 관계자는 "경기 전망이 좋지 않은데도 금리가 낮기 때문에 신설법인이 많아졌다" 고 진단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河모(41)씨는 요즘 마땅한 부업 거리를 찾느라 분주하다. 암웨이 등 부업을 하는 동료 직원들이 적지않은 데 자극받았다.

河씨는 "평생 직장이란 개념이 없어진 지 오래고 저축으로 돈을 모으기도 어려워져 부업을 찾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고 말했다. S그룹에선 직원들에게 '부업 금지령' 을 내릴 정도다.

가계 빚의 증가 속도는 이런 현상들을 통계적으로 뒷받침한다. 올 2분기 중 가계 빚은 19조7천4백억원이 늘어 증가액이 1분기(9조3천2백억원)의 배를 넘었다.

초저금리 상황에서 연 6~7%대인 주택담보대출이 8조원 늘었고, 신용카드를 이용해 외상으로 물건을 산 대금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1% 급증했다.

그러다보니 가구당 평균 빚이 2천70만원으로 처음으로 2천만원을 넘었다. 빚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이다.

정철근 기자 jcom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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