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외면 당한 정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보선의 의의>
11·9보선은 저조했지만 평온 속에 끝났다. 서울의 1개 구의 광주갑구 등 5개 구의 평균 투표율은 26·1%로서 선거사상 가장 저율이었다.
이번 보선은 국회의 한·일 협정비준동의를 반대, 의회해산을 요구하는 민중당 강경파의원의 사퇴로 실시된 것이었지만 사퇴의원이 출마를 포기했고 공화당조차도 선거를 포기, 결국 쟁점이 모호한 한갓 의석 채우기로 전락함으로써 애초부터 외면된 선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저조한 투표율은 국민의 정치불신을 반영, 공화당과 민중당에 중대한 경종을 울렸다. 어쨌든 쟁점이 모호한채 다수 유권자의 외면으로 극히 저조했던 보선에서 정치적 의의를 찾기는 어렵다.

<야당의 명백>
그러나 분열을 거듭하고있는 야당에는 험준한 산맥을 예고했다.
민중당은 3개 구에서 승리, 제1야당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했다. 강경파는 온건파만이 남은 민중극을 견제하고 각 구에서 군소 야당 후보로 나온 자파 인사를 지원했으나 기존기반을 가진 광주 갑구의 유수현씨 만을 당선시켰다.
따라서 강경파 사퇴의원이 출마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온건파 견제 작전이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데서 강경신당의 출범과 그 앞날은 결코 순탄하지 못하게 되었다. 민중당도 통합된 군일야당의 명맥을 잃었다.
당의 총력을 기울였으면서도 군소 야당을 완전히 누르지 못한 채 제 1야당의 위치를 유지하는데 그쳤다는 것은 큰 문젯거리를 남겼다. 적어도 내후년 선거에서 불가피하게 당해야할 야당의 분산을 뚫고 여당과 대결하는 대표야당의 위치를 다듬기 위해서는 많은 시련을 지금부터 겪어가야 하는 것이다.
자유당은 재기의 가능성을 저울질한다고 내세웠지만 완패했다. 이것은 국민이 오늘의 정치를 불신 하면서도 자유당에 대한 기대는 그다지 걸지 않고 있음을 실증한 것 같다. 또 출마자들의 연령이 고령이라는데도 흠이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쟁점이 모호했던 선거에서 대부분의 정치의견 높은 지식층이 기권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양당 제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흐려진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의회내 분포>
선거의 결과는 민중당이 3석을 더해서 59석으로 늘어났고 지금까지 의석은 갖지 못했던 정민회와 한독당이 각각 1석씩을 얻어 의석 있는 야당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4명의 원내무 소속을 합쳐 6명뿐인 수자로는 원내교섭단체 구성이 필수였고 그들 모두가 정치성격이 판이하다.
따라서 원내 무소속의 [그룹] 활동은 기대할 수 없으며 모두가 외토리적 존재로서 이렇다할 원내 활동을 남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국회는 계속 여당인 공화당과 야당인 민중당에 의해 운영되어 가게 되었다.
따라서 군소 야당의 의회 진출은 아직도 철저히 봉쇄되고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 이번 선거에서 복고경향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신인진출의 가능성을 높였다는 것은 민중당에 대결할 강경신당의 구도를 약간은 수정하게 할지도 모른다.
각 후보자는 애초부터 저율의 투표를 예상, 동원을 위한 조직에 힘을 집중시켰다.
합동강연회에는 최저1백명, 최고 3백명의 청중이 모였을 뿐이며 개인 강연회는 이 보다 더 한산했다. 따라서 여론의 판정을 얻기 위해 후보자가 소신을 내세우는 일은 뒤로 밀리고 영세시민을 얽어매기 위한 변두리로 선거운동이 집중되었다. 따라서 연고관계, 조직 그리고 돈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아야한다.

<표수의 특징>
전체 후보의 득표수를 정당별로 보면 ①민중당 ②자유당 ③한독당 ④추풍회 ⑤정민회 ⑥보수당 ⑦신민회의 순(10일 상오 4시 현재)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동원의 조직력이 그래도 세고 명목 면에서 강점을 지닌 민중당과 과거의 관록에 있어 개인적으로 비중이 큰 자유당이 이번 선거에서 좋은 [라이벌]이 되리라던 예상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한독 당이 크게 [클로스업]된 것은 한·일 협정비준반대투쟁의 반사적 효과 때문이었다 할까. 하여간 이 보선에도 한·일 협정파동이 긴 꼬리를 남기고 있었다. 이번 보선에서는 누구도 압도적인 표수차로 당선되지는 못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