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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아이크]회고록 제3부|투쟁적인 [흐] 달래|베를린 해빙 시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제18장 개인외교에서>"…우리 양국은 강대국인 까닭에 싸움을 할 수가 없고 따라서 양국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에 의해 나는 귀국의 초청을 수락, 방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우리 두나라가 평화롭게 살 수 있으며 또 평화를 위해 노력을 함께 할 수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회제도를 갖고 모두 자기들의 제도가 좋다고 믿고 있읍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공개적인 싸움을 벌여야 할 이유가 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읍니다. 그것은 역사로 하여금 누가 옳은가를 판단케 합시다.
만일에 이 원칙이 받아들여지기로 합의된다면 우리는 평화와 우호를 기반으로 양국관계를 수립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소련은 아무것도 미국으로부터 필요한 것이 없고 또 미국도 우리것이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을 것 입니다.
오늘날 당신들이 우리보다 더 부강한 것이 사실이지만 내일엔 우리는 당신들과 똑같이 부강해 질 것이며 모레는 오히려 당신들보다도 더 부강해 질 것입니다.
우리힘으로 성취하는 것이 나쁘다고 아무도 말못 할 것입니다.
나는 내 정부에 미국에서의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다고 통보를 해주었읍니다.…"
1959년 9월 15일 미국 방문의 첫날 [후루시초프]소련수상은 백악관의 정찬회 석상에서 이와같이 연설을 했다.
교묘한 자기들의 선전과 정치적논쟁까지도 곁들인 멋들어진 [흐루시초프]의 말이었다.
그러나 [베를린]에 위기가 계속되고 동서간의 냉전이 절정에 달하고있던 그때 [흐루시초프]의 이같은 연설은 냉전에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을 충분히 시사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동안 [흐루시초프]는 미국 각지를 순방하고 [워싱턴]으로 돌아와 [캠프·데이비드]산장으로 나와함께 공식회담을 갖기위해 떠난 것이다. [흐루시초프]는 첫날 백악관에서 그의 훌륭한 토론가로서의 지질을 충분히 과시했고 특히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고 그것을 이용,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말재주가 대단했다.
내가 [흐루시초프]와의 회담에서 희망했던 것은 서부[베를린]에 대해 끊임없이 가해지는 소련의 위협을 제거해보려는 것이 제일 큰 목적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베를린]문제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입장을 직접 알려주고 평화회복의 기수로서 정치가의 경륜을 세우라고 역설하려던 것이 나의 복안이었다. 물론 그와같은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외상등 보좌관들이 합석한 자리에서 [흐루시초프]는 여전히 투쟁적인 면모를 보였고 [닉슨]부통령과는 특별히 토론을 잘벌였다. 그러나 [캠프·데이비드]산장에서의 [흐루시초프]의 모습은 훨씬 유화했고 표정도 부드러워 원래 내가 예정했던 개별적이고 사적인 회담을 갖기가 수윌해진 것이다.
[흐루시초프]의 통역 한사람만을 데리고 우리들은 보좌관들을 멀리하고 이야기를 몇차렌가 나눈 것이다. 나는 미국이 [베를린]문제를 절대로 양보 안한다고 역설을 몇차렌가 했다. 그러자 마침내 그는 소련이 동독과 단독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하겠다는 그들의 위위을 철회하기로 했다고 약속을 한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괄목할 만한 [흐루시초프]의 양보였고 [베를린]위기해소의 실마리가 마련되는 계기였다.
잠시후 그는 공동성명에서 소련의 이와같은 양보를 발표하지 말자고 제의를 해왔다. "그러면 만사는 끝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정상회담에 나갈 수도 없고 소련방문도 안하겠습니다." 나는 조용히 그러나 무자비하게 못을 박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흐루시초프]는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각료들에게 통보해 줄 시간의 여유를 요청했고 나는 그것에 동의를 해주었다.
그로부터 48시간 후 극적인 발표는 이루어진 것이다. [캠프·데이비드]정신―[흐루시초프]가 그후 줄곧 애용했고 나는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에 동의하지 않지만 하여간 [캠프·데이비드]회담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끝을 맺은 것이다.
하여간 이 회담을 고비로 서방측의 큰 양보없이 긴장이 감돌던 동·서간의 대립은 표면상으로는 완화되기 시작했으며 국내의 비관적이었던 여론도 따라서 호전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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