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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석괴(石怪) 삼전도비 Ⅱ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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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 그려낸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논쟁을 떠올린다. 싸울 것이냐, 아니면 화친을 청할 것이냐를 두고 왕 앞에서 벌이는 소설 속 대화는 이랬다.

"안이 피폐하면 내실을 도모할 수 없고, 내실이 없으면 어찌 나가 싸울 수 있겠나이까. 싸울 자리에서 싸우고, 지킬 자리에서 지키고, 물러설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이 사리일진대…"(최명길)
"화(和)자를 먼저 꺼내면 적들은 우리를 깔보고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해 올 것입니다. 싸울 수 없는 자리에서도 기꺼이 싸우는 것이 전(戰)이요, 지킬 수 없는 자리에서 지키는 것이 수(守)입니다. 지금 화해하고자 나서는 것은 화(和)가 아니라 항(降)일 뿐이오."(김상헌)

최명길은 화친을 통해 힘을 기른 뒤 훗날을 모색하자고 했고, 김상헌은 대의(大義)를 내세우며항전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城)에 갖혀서도 그렇게 싸우고 있었다. 375년 전의 일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무거운 존재감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국을 앞에 두고 찢기고, 나뉘어 서로 헐뜯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우리는 중국과 관련된 사안에 너무 쉽게 흥분한다. 생각하고 싶은 데로만 생각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전략적 고려가 약하다. 2010년 천안함이 침몰했을 때도, 연평도가 폭격 당했을 때도 그랬다. 중국이 북한을 감싸고 돌자 "때 놈들이 어찌 그럴 수 있어"라며 흥분했다. 내가 원한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달랐다. 중국은 큰 사건에 직면하면 '냉정하게 관찰하고, 국내 진용을 갖추고, 무겁고 침착하게 대응한다(冷靜觀察, 穩住陣脚, ?着應付)'는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 중국을 향해 우리가 먼저 흥분하고 나섰으니 얻을 것은 없었다.

우리의 대응은 화전양면(和戰兩面)이어야 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중국의 태도를 엄중히 비난하고, "아시아 대국으로 크겠다는 나라가 인류 평화의 대의를 내팽개쳤다"는 점을 집요하게 공격했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협상하고, 따져묻고, 조정해야 한다.

양국과의 교류가 전면적으로 확대된 지금 갈등은 불가피하고, 당연한 일이다. 갈등을 무서워하고, 피해선 안된다. 갈등이 생기면 정면적으로 붙어보겠다는 결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손해를 보더라도 지켜야할 것이 있다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대화하고 조정할 수 있는 화(和)의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싸움(戰)은 궁극적으로는 화(和)를 향한 것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해지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당(唐)에 맞서 북방 민족의 정체성을 지켰던 고구려의 기개와 당의 힘을 이용해 통일을 이끌어낸 신라의 외교 역량이 모두 필요한 시점이다.

꿀릴 이유도 없다. 중국은 결코 한국을 제처놓고 아시아 협력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주변에서 친구할만한 제대로된 시장경제 국가는 한국밖에 없다.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만나는 접접에 있는 한국은 결코 중국의 뜻대로 농락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중국에 대한 도덕적 우위와 문화적 우월감을 잃지 않는다면 아무리 중국이 큰 나라가 된다고 해도 주눅들 이유는 없다.

친중(親中)과 친미(親美)라는 이분법적 접근은 곤란하다. 이 정권에서는 중국으로 쏠리고, 저 정권에서는 미국으로 쏠리는 것은 더 위험하다. 두 진영 모두에게서 외면받을 뿐이다. 유연성으로 우리 만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때로는 미국편인지, 중국편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의도된 모호성(ambiguity)으로 전략적 가치를 높일 수 있다. 그게 바로 덩샤오핑이 말한 '도광양회(韜光養晦)다. 우리라고 못할 게 없다.

핵심은 신뢰다. 입체적인 '신뢰 라인'을 형성해야 한다. 일이 터졌을 때 전화 연결해서 '꼬통(溝通)'통하고, 조율할 수 있는 휴먼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현실은 암울하다. 베이징의 주중한국대사관에서 막 귀임한 한 외교관은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같은 급 중국 정치인을 만나면 말빨이 서지 않는다"고 말한다. 중국에 대한 연구가 얕기 때문이다. 만나 얘기하면 금방 밑천이 드러나니 토론이 될 리 없다. 그리고는 돌아갈 때 "서울에 가 꼭 중국 공부 많이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거기가 끝이다.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 그들의 결심은 정쟁(政爭)의 파랑에 휩쓸려 사라지고 만다. 이래서야 어찌 산적한 양국 관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당 관계자들과 만나 진지하게 토론하고, 논쟁을 벌이고,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는, 그런 모습을 기대하고 또 기대해본다. 더 이상 "일본과는 끈이 있는데 중국에는 없다"는 말이 나와선 안된다.

중국은 시진핑을 정점으로 하는 제5세대 지도부를 출범시켰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선거가 있고, 새 정부가 들어선다. 변화의 계기다. 권력의 교체기, 그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신뢰라인을 형성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시진핑 시기 향후 10년을 책임질 사람이 누군지를 찾아내 관계를 만들고, 우력 인사를 우군으로 확보해 한다. 양국이 수교 20년으로 접어들고, 두 나라가 지도부가 바뀌는 2012년이 기회다. 경제는 활기를 띠지만 정치는 냉각되는 '정냉경열(政冷經熱)'구도로는 중국과 함께 21세기 아시아 시대를 논의할 수도 없다. 그러기에 더욱 양국간 난마를 풀어갈 정치적 지혜가 필요하다.

이게 어찌 정치만의 문제이겠는가. 기업도, 정부도, 학계도, 언론계 기자들도 각자의 파트너와 만나 입체적인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 결국 사람이다. 각계에서 중국을 아는 '중국통' 인재를 키워야 한다. 대학ㆍ기업ㆍ연구소 등에 흩어져있는 지식을 유기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중국 전문가 풀(pool)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미래 한중관계를 위한 초석을 깐다는 차원에서 한국에 와 공부하고 있는 중국 유학생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인재를 키우는 것, 중국 전략의 시작이다.

다시 남한산성.

최명길이 말을 이어간다.

"군신히 함께 피를 흘리더라도 적게 흘리는 편이 이(利)로울 텐데, 의(義)를 내세운다고 이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대의명분에 얽메여 국가 이익을 놓치고 있는 척화파를 겨냥한 말이다. 김상헌이 되받아친다.

"명길의 말은 의도 아니고 이도 아니옵니다. 명길은 울면서 노래하고 웃으면서 곡(哭)하려는 자이옵니다"
김상헌은 대의극명(大義克明)의 길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 대사를 어찌 의(義)로만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답답한 최명길은 물러나며 이렇게 읊조린다.

"웃으면서 곡할 줄 알아야…"

최명길은 유연성과 실리를 말하고 있었다.

Woody Han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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