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오지로 불어 가는 바람의 노래

중앙일보

입력

바람의 딸 한비야 씨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어디론가 쉴 새없이 날아다닌다. 느낌과 생각과 행동이 동시에 발화되면서 터져 나오는 그녀의 달변은 소위 '말발'만이 아니다. 바람의 딸은 현실의 육체가 고정돼있어도 그 타고난 마음의 지도를 종횡으로 펄럭거리며 듣는 이의 마음을 간단없이 사로잡는다. 순간, 그녀의 청취자는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 바람의 파동에 모든 가식적인 무장을 해제하게 된다. 그렇다고 바람의 딸이 그들을 지배하는 건 아니다. 바람의 딸은 갖가지 핑계와 제약들로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덩실덩실 흔들어대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날아보자고 권유할 뿐이다. 그러는 동안 그녀와 마주앉은 마음의 거석들은 갈가리 모래가 되고 먼지가 돼 일상에 가려진 마음의 오지를 향해 날아다닌다. 그건 스스로가 고집스럽게, 그리고 비좁은 마음으로 규정지은 나를, 스스로의 바깥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만드는, 무척이나 황홀한 균열이다.

인간은 움직이는 물건 아닌가요?
한비야씨는 중국어 공부를 위해 2000년 3월부터 1년 간 베이징에 머물렀다.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걸 어떻게 다스렸을까 싶지만, 두 발로 돌아다니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라는 걸 아는 그녀는 베이징의 한 호텔 방에 마음의 지도를 펼쳐놓고 중국어라는, 그녀로서는 미답의 영역에 도전한 것이다. 그러면서 애초에 목적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귀국했다. 베이징은 중국이란 거대한 땅덩이 위에서 일개 점으로도 표시되지 못할 공간이지만, 그녀의 탁 트인 시선을 감안한다면, 몇 천만 분의 일밖에 안될 단면을 통해 전체의 윤곽을 헤아리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듯 싶다. 최근 출간된 『중국견문록』(푸른숲)은 그녀가 중국어 공부에 매진하면서 얻어낸, 아주 짭짤한 부수이득이다.

"인간은 동물이에요. 동물이란 건 '움직이는 물건'이라는 소리 아닌가요? 그러니까 인간은 태생부터 움직이면서 살아가게 돼 있는 거라구요."

거리낌없이 자신만의 인간론을 펼치면서 말문을 여는 바람의 딸에게선 그 순간에도 쌩쌩 바람소리가 들린다. 뿌리란 게 있는지조차 의식 못할 정도로 굳어버린 마음의 결들을 한 올 한 올 건드리면서 잊혀졌던 존재의 뿌리를 깨닫게 할 만큼 서늘하게. 사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의심해보면서 사는 경우가 그리 흔하지 않듯이,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때로 우리를 배반한다. 그것이 확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요지부동이어서 '다른 나'를 탐색할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생각지도 않은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아요. '아니, 내가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었나' 할 때도 있고 스스로 실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오래 여행하다보면 점점 강하고 아름다워지는 나를 발견하게 되죠. 사실 살면서 자신을 확인하게 되는 경우란 게 한정돼 있잖아요. 일상에 매어있으면 있을수록 스스로의 감춰진 면, 보다 참다운 면을 놓치게 돼요. 그래서 전 사람들이 좀 더 활개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끊임없이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면서 활개치고 다니는 동안, 한비야씨는 자신이 몰랐던, 한국인에 대한 강한 주체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녀가 말하는 애국심, 그리고 조국의 개념은 간단하다. 요컨대, 떠난 만큼 되돌아와 자신의 원류를 확인하고 또다시 떠남을 준비하는 육체적, 정신적 기점으로서의 '베이스캠프'라는 것이다. 베이스캠프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는 주로 독서에 몰입한다. 세계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날아다니는 그 날렵한 축지법으로 한국을 떠나있는 동안 마음의 서고에 쌓여있던 책들을 일사천리로 독파하는데, 1년에 1백권 정도는 거뜬히 읽어낸다고 한다.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것들로는 피에르 신부의 『단순한 기쁨』, 공선옥의 소설 『수수밭으로 오세요』, 개정판으로 나온 『월든』, 『마르크스 평전』 등 그 종류도 다종다양하다.

내·외적으로 풍부해진 경험을 바탕으로 한비야씨는 요즘 새로운 사업에 골몰하고 있다. NGO 월드뉴스 긴급구호활동이 그것이다. 중국에서 중국어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틈틈이 캄보디아 등으로 날아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난민들을 위해 구호 활동을 펼쳤다. 그 자세한 내용이 『중국견문록』에 소개돼 있다. 난민 구호 활동을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도 그녀는 명쾌하게 대답한다.

"무슨 커다란 명분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건 아니에요. 전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이랍니다. 제가 하고싶지 않은 일은 절대 안 해요. 그런데 제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경험했던 난민들의 실상이 제 마음의 지도에 불을 밝혔어요. 여행하다 보면 처음엔 어둡기만 하던 마음의 지도가 일순간 켜지게 되는데,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에 터지면서 새로운 길이 나타나곤 해요. 그러면 전 늘 새로운 마음으로 또다른 일을 준비하게 되는 거예요."

여행이란 어두운 마음의 지도에 불을 켜는 일
바람의 딸은 인간의 몸에는 인류의 모든 유전자가 들어있다고 말한다. 그것들이 자극 받기 위해서는 몸으로 말하고 몸으로 깨닫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자신의 진정한 길이라는 건 사방으로 고립된 일상의 바깥, 어둡고 두렵게만 느껴지는 한계 바깥에 늘 가능태로 존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거기에 전원을 넣어 새로운 길을 밝히는 건 오로지 '여기에 있는 몸'을 '저 바깥'으로 이동시키는 결기와 단호함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결단이 아무에게나 가능할 수 있을까? 그녀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말한다.

"여행을 떠날 때 전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요. 초파리와 사람의 유전자가 60퍼센트 정도 동일하데요. 침팬지랑은 교배도 가능하고요. 그러니 사람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어요. 낯선 사람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만 없앤다면 세계의 어딘들 무섭겠어요?"

이렇듯 당찬 자신감으로 그녀는 앞으로 긴급구호활동과 더불어 소위 힘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중재하고 협상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녀 스스로 자신하건대, 그녀는 누군가를 설득시키는 일에서 능력의 최대치가 발휘된다고 한다. 그녀가 여행을 다니면서 겪은 일들을 일일이 책으로 써내는 것도 이런 일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자신의 책과 독자들이 함께 커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미풍을 맞은 나무에서 시든 나뭇잎들이 떨어져 내리듯, 무감각한 일상의 신경들을 '움직이는 물건'이라는 원류의 감각으로 되돌려 보다 풍요로운 삶의 지도를 가꾸도록 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대뜸, "한비야씨! 안녕하세요. 저 한비야씨 팬이에요. 굉장히 부럽게 사시더라구요!"하며 반색을 한다. 바람의 딸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흔한 일상의 사건이며 즐거움이겠는가? 그 누가 그녀를 모르겠는가? 늘 곁에 있으면서도 느끼려 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바람의 속성일진대... (강정/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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