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국화와 플래카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K교수의 문병을 갔다. 폐암이었다. 살풍경한 입원실, [배드]에서 K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눈물이 삶에 대한 애착때문이었을 줄로 알았다. 그러나 K교수는 담담한 목소리로 스스로 자기의 눈물에 대해서 이렇게 해명을 하는 것이었다. 죽기가 서러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했다. 처음엔 자기병이 폐암인 줄도 몰랐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간병을 온 제자들이 찾아와서는 으레 한마디씩 하더라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맡으신 강의를 저에게 맡겨 달라는 것이었고, 그러면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그 학문을 이어겠다는 것이었다. K교수는 그때, 자기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서러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도리어 각박한 세상인심이라 했다. 사랑하던 옛 제자들이 꼭 자기 눈에는 난파선을 쫓아오는 상어떼 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눈물이 번진 K교수의 얼굴에는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이젠 기적이 일어나도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서 눈물이 번진 눈으로 머리맡의 국화를 더듬고 있었다. 그것은 백국이었다. 서리가 내리는 철에 도리어 향기속에서 피어오른 한송이 백국이었다. K교수에게는 문병객보다도 그 국화가 반가운 듯 싶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국화의 고절뿐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런 세상에 아직도 국화꽃이 피어난다는 것이 기특하고 대견하게 느꼈는지 모른다.
병원뜰에도 국화꽃들이 피어 있었다. 머지 않아 서리가 내리고 추운 계절이 올 것이다. 마지막 계절을 위해서 꽃술을 드리운 국화만이 생명의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국화위에는 비정의「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것은 때아닌 보궐선거를 위한 현수막이었다. 자퇴한 의원자리를 차지할 작정으로 이름석자를 내건 현수막의 문자들은 어쩐지 서리 처럼 가슴에 못을 박는다. 만추의 인상은 한층 더 착잡하다. 국화와「플래카드」때문에, 우리들의 만추는 더욱더 썰렁하다. 변절의 계절,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까지 난파선을 쫓는 상어 떼처럼 보이는 우울한 계절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