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움에서 카리스마까지, 변신의 귀재 이정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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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자〉로 스크린에 데뷔했고, 골격을 잘 갖춘 세련된 외모로 여전히 우리에게 ‘젊은 남자’로 존재하는 배우 이정재. 새 영화 <흑수선> 촬영장에서 그를 만났다. 그리고 데뷔작 이후 두 번째로 배창호 감독과 작업하는 ‘인연’을 빌려 그에게 질문했다. 당신에게 지난 8년이라는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느냐고. 이정재 스스로 더듬어본 시간에 대한 짧은 기록.


“어떤 타입의 남자를 좋아하죠?”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남자요.”
하지만 이건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들이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좋아하는 외모적 타입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니까. 가령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윽한 눈동자를 지녔다든가 기분 좋은 탄력을 가진 넓은 가슴, 신경질적으로 가늘고 긴 손가락, 엉덩이가 바싹 올라간 긴 다리, 육감적인 입술 등등 시시콜콜하고 때로는 제법 구체적인 성적 기호들이 누구에게든 있다. 그리고 이런 러프 스케치가 머릿속에서 밖으로 나올 때는 1백 퍼센트 완벽한 아도니스는 아니지만 대부분 남자 배우들의 모습이 거론된다.
이정재라는 이름이 여성들의 저녁식사에서 튀어나올 때도 이때다. 물론 그는 만인의 연인이다. 그를 싫어하는 여성? 만약 “내 타입은 아니야”라고 잘라 말하는 여성이 있더라도, 솔직히 그녀도 속으로 한 번쯤은 그와 ‘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이 이정재에게는 행복 또는 불행의 요인이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섹시한 외모, 그러니까 동시대 남성 배우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가슴을 지닌 남자로만 기억할 뿐 도무지 얼마나 영민하게 배우로서의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가 무슨 무슨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8년 차 배우를 놓고 새삼스레 ‘연기론’을 거론하자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정재라는 이름에 고착된 이미지는 8년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젊은 남자’, 그것이었다.

<흑수선>을 위해 단단하게 조이고 가라앉힌 것들


이정재는 현재 배창호 감독의 새 영화 <흑수선> 촬영에 몰두하고 있다. 제목만 듣고 상상한다면 주인공이 검정 가면이라도 쓰고 나오는 시대물 같지만, <흑수선>은 미스터리 서스펜스 형식을 띤 형사 추리물이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 사건. 집요하게 범인을 추적하던 젊은 형사 오병호(이정재)는 사건의 끝에 6·25 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던 북한군과 빨치산 포로들의 갈등과 비밀이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양수리 제1 세트장에 들어섰을 때, 그는 미세한 연기에 쌓여 있었다. 영화 이미지에 맞는 묘한 컬러감을 만들어내기 위해 세트장에는 며칠 전부터 커피 가루를 태운 연기가 피워지고 있었다. 때마침 밖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어서 미세한 연기가 엷게 내려앉은 실내는 대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열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서 잠시 그를 관찰했다. 이제 막 한 신을 끝낸 후 숨을 고르고 있는 그의 피부는 아주 건강하게 그을려 있었고, 팔과 가슴의 탄탄하게 팽창된 근육들은 카키색 셔츠를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전작인 <선물>의 말랑말랑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전체적으로 단단하게 조여진 느낌이다.
“캐릭터가 바뀌면 모습부터 바꾸려고 노력하죠. 이번 작품의 경우는 남성적인 이미지를 많이 필요로 하니까 피부 톤을 검게 하고, 수염도 까칠하게 내버려두고. 전작들 같으면 몸이 이렇게 부풀면 곤란했을 텐데 액션 영화니까 강한 근육(상대방을 한 방 치면 나가떨어질 것 같은)도 필요하고.”
목소리 톤도 달라진 느낌이다. 중심이 아래쪽으로 내려앉은 듯한 목소리도 그가 이번 영화를 위해 만든 것이라는데 탁성을 위해 폭포 밑에라도 가 있었던 거냐, 고 물었더니 빙그레 웃는다.
“원래 제 목소리는 이것보다는 높은데 아무래도 영화 성격상 목소리가 가벼우면 안 되니까 가라앉히는 훈련을 했죠. 무게감이 느껴지도록 다른 호흡법도 훈련하고. 자세한 건 비밀이에요. 앞으로 나는 뭐 먹고 살라고(웃음).”

왕성한 식욕으로 다양한 캐릭터를 섭렵하다


그의 말처럼 참 오랜만에 몸을 만들고 목소리를 다듬어서 시작한, 멜로에서 액션으로의 전환이다. 그에게 생경한 지대는 아니다. 오히려 본연의 캐릭터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그의 존재가 우리에게 각인된 것은 <모래시계>에서의 ‘백재희’였다. 눈이 감기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사랑하던 여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계속 산소 마스크를 벗어제끼던, 지고지순한 보디가드의 감동적인 사랑은 여성 팬들이 절대적인 환호를 지르기에 충분했으니까. 자신의 여자를 지키기 위해 휘둘렀던 백재희의 검은 또 얼마나 우아한 액션을 보여주었던가!
하지만 군대를 다녀와서까지 <모래시계> 이미지는 강하게 남아서 한동안 덫이 되기도 했다. 자의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백재희’ 이미지를 업고 쉽게 가려 했던 <불새>는 철저하게 실패했고(그 자신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작품이다), 그 후 ‘완전히 망가져보자’했던 <박대박>의 선택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관객들이 원하는 것을 무시하고 내 결정에 자만했던 작품”이라는 것이 <박대박>에 대한 그의 평가. 그러나 이정재는 이 두 작품으로 더 이상 실패하지 않을 방법, 관객이 배우에게 바라는 것과 배우로서 가지는 욕심,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접합시켜야 하는지를 터득한 것 같다. 그의 연기 행보는 쉼이 없었다. 기본적인 큰 바운더리는 멜로였지만 그 안에서 그는 엄청난 식욕으로 다양한 캐릭터를 폭넓게 섭렵해 나갔고, 그 선택들은 제대로 된 소화 능력을 결과로 보여주었다.
“<정사>는 남자 캐릭터가 신비했죠. 브라질과 약혼녀의 언니를 사랑할 수 있는 남자라면 평범한 사람은 아니니까. <태양은 없다>에서는 아주 치졸한 양아치였죠. ‘이정재가 남의 돈을 들고 튀다니!’ 뭐 이런 식의 뒤집기를 한 건데 반응이 좋았어요. <이재수의 난>은 나하고는 절대 안 어울린다는 사극이었지만 박광수 감독님과 인연을 만들고 싶어서 선택했던 작품이고, 잔잔하고 독특한 형식이 좋아서 <인터뷰>를 찍었죠.”
일반인들의 인터뷰가 삽입된 <인터뷰>를 찍으면서 한 가지 다짐한 것이 있다. ‘연기를 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무리 리얼하게 ‘연기’를 하더라도 일반인들처럼 자연스러울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연기를 하지 말자, 생각했죠. <인터뷰>가 그랬고, <시월애>는 더 안 했고, <순애보>에서는 아예 연기를 안 했죠(웃음). 그런 거예요. 앞뒤 신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 가운데 있는 얼굴은 무표정하더라도(연기를 하지 않더라도) 슬픈 얼굴이 될 수도 있고, 기쁜 얼굴이 될 수도 있다는 거죠. 내면에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얼굴은 무표정이지만 느낌은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거든요. 그냥 저를 훈련시키는 작업들을 한 거죠.”

배우 이정재와 인간 이정재, 그 사이에서 만나다


촬영장 구석에서 나누던 그와의 인터뷰는 자주 끊겼다. 다음 신이 준비됐음을 알리느라, 허리에 찬 녹음기(처음에는 이것이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위치 탐지기인 줄 알았다)를 확인하기 위해 스태프들이 오갔고, 그가 중간중간 촬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안했다. 서둘러 인터뷰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진행한 건 세트장 밖에서의 촬영 한 컷. 멀리 갈 수 없는 그를 위해 세트장 바로 문 밖에서 찍기로 했다. 사다리 위로 올라갈 것과 인간 이정재다운 자연스러운 표정을 부탁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헤벌레’ 함박웃음을 짓는다. 하회탈이 돼버린 그에게 오버하지 말라고 했더니 “이게 인간 이정재의 모습인데”라며 또 한번 고른 치열을 드러내고 아이처럼 웃는다. 그러고는 필름을 갈아 끼우는 막간을 이용해 사다리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저러다 괜히 떨어져서 다치면 곤란하지. 스태프들은 가슴이 자꾸만 콩알만해지는데 “촬영 끝나면 강시처럼 이걸 타고 들어갈까”라고 농담을 하며 그는 계속해서 사다리를 앞뒤로 흔들고 그 위에서 ‘콩콩’거린다. 빗방울이 어깨 위로, 얼굴 위로 떨어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밝게 웃고 장난을 쳤다.
다섯 시간 동안 배우 이정재를 목격하고, 15분 동안 인간 이정재를 만난 후의 결론? 그에게서 한 가지 이미지만을 고집하는 일은 관객으로서 즐거움을 포기하는 일이라는 사실. 그는 지금까지도 ‘배우라는 이름의 물고기’처럼 스무 살의 청춘 가운데를 잘 유영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그가 배우라는 직업을 즐기는 만큼 관객들도 그의 움직임을 즐기는 게 어떨지.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이자면 30세가 넘으면서 그의 외모는 더욱 섹시해질 것 같다.

■ 영화 '무사'로 돌아온 로맨틱 가이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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