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대선후보가 기억해야 하는 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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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양선희
논설위원

최근에 보고 정신이 번쩍 든 수치가 있었다. 2.2%.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전망한 올해 경제성장률 수정전망치다. 그동안 이런 성장률은 미국·일본 같은 나라에서나 나오는 건 줄 알았다. 지난해 연말 KDI가 전망했던 올해 성장률은 3.8%, 다른 기관들도 3.5~3.8% 선이었다. 후한 전망치는 아니었는데도 1년 내내 이를 싹뚝싹뚝 잘라먹으며 3분기에 2.5%로 낮추더니 또 0.3%포인트를 깎았다.

 KDI가 내놓은 내년 전망치는 3.0%. 다른 기관들도 2.8~3.2% 선이다. 물론 전해 연말에 내놓은 전망치가 맞아떨어지는 걸 본 적이 없으니 내년 결말은 달라질 거다. 어쩌면 1%대도 볼 수 있을 거다. 두 자릿수 성장률을 구가하던 개발연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터라 한 자릿수 성장률에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는데, 이젠 뒷걸음질치는 것까지 봐야 할 형편이다. 오래 산 것도 아닌데, 참 인생이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 보면, 우리 개발연대는 운도 좋았다. 세계시장은 팽창기였고, 우리만 잘 하면 되는 게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보다 세계시장이 더 우울하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의 3대 시장인 유로존의 경제위기는 헤아려볼 엄두도 나지 않고, 미국과 중국도 제 코가 석 자다.

 미국에서는 오바마노믹스가 강건하니 양적완화 기조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고, 이 와중에 원화강세는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시진핑(習近平) 시대의 중국은 국가만 부유한 ‘국부민궁(國富民窮)’에서 벗어나 국민을 부유하게(富民) 하고 내수를 진작시키겠단다. 잘만 되면 중국에 큰 내수시장이 열릴 거다. 그런데 그동안 ‘세계의 공장’ 중국에 자본재와 중간재를 주로 팔았던 우리에게 중국의 내수시장 팽창이 유리한지 의문이다. 한 마디로 두 시장에서 재미를 보기엔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말이다.

 내년엔 정부가 바뀐다. 박근혜-문재인 중 한 진영이 집권할 거다. 한데 양 진영 공약을 보면, 벌 대책은 없는데 쓸 궁리는 무한정이다. 과거문제에 매달려 투닥거리는 양 진영은 ‘따뜻한 복지’에 관해서는 한 목소리를 낸다. ‘지금은 복지확장기’(박근혜)란다. 공약대로라면 아이는 낳기만 하면 나라에서 키워주고, 대학도 반값에 다니고, 나이 들면 나라가 돈을 주고, 병들어도 걱정이 없다. 누가 되든 지상낙원이요, 나라가 따뜻하게 보호해 주니 국민은 할 일이 없다.

 그런데 이 말, 실은 국민들이 별로 안 믿는 눈치다. 시장 아주머니들도 “대선용 공약(空約)을 뭘 믿느냐”며 혀를 끌끌 찬다. 한 독자는 “우리 국민이 얼마나 강한데, 정치인들은 맨날 눈물을 닦아준다는 둥 하느냐. 이런 정치인들이 요즘 내탓은 않고, 남탓만 하는 풍토를 부추기는 게 아닌지 걱정”이라는 e-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정말 뒷수발 자처하는 따뜻한 정부일까? 이날까지 나라에다 밥 달라며 떼쓴 적이 없다 보니 정치인들의 따뜻한 표정이 오히려 낯설다. 원래 한국인은 나라에 위기가 오면 자기가 할 일부터 찾는 습성이 있다. 외환위기 당시 ‘금을 모으자’는 한 마디에 엄동설한에 줄까지 서가며 금을 바친 국민이다. 이런 만만찮은 국민을 두고, 무슨 이유로 아이마냥 보호하겠다며 후보마다 ‘선량한 얼굴’을 뒤집어쓰고 나서는지 모르겠다. 경제도 암울하고, 능력도 안 되면서.

 물론 보육료 주면 살림에 보탬 되고 좋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싶은 건 나라의 활력을 되찾으려면 국민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한국인은 누구나 나갈 방향만 알면 자신을 희생하며 그 길로 매진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만 잘하면 됐던 ‘게임의 룰’이 바뀌는 바람에 방향을 잃었다.

우리가 대통령후보에게서 듣고 싶은 건 뜬구름 잡는 지상낙원타령이나 과거의 잘잘못이 아니다. 정확한 현실인식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 그리고 국민이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제대로 미래 청사진을 그리고, 국민에게 어려운 길로 가달라고 촉구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한국인은 강하고 미래를 원한다는 것을 후보들이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