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셰·람보르…회장님 재산숨긴 장소 '의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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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영 전 부산저축은행 대표가 소장하던 중국 화가 장샤오강의 ‘혈연’.

예금보험공사 재산조사실 양건승 팀장은 지난달 ‘은닉재산신고센터’ 사이트에 올라온 제보를 둘러보다 눈이 번쩍 뜨였다. 수백억원대의 부실·불법 대출을 해준 혐의로 구속된 채규철 전 도민저축은행 회장의 숨겨진 재산에 대한 내용이었다. 제보자와 접촉해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한 양 팀장은 서울 모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채 전 회장이 숨겨놓은 람보르기니·포르셰 등 외제차 4대를 찾아냈다. 차량 안에는 고가의 외제 골프채 수십 점도 발견됐다. 최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부실 금융회사 대주주의 재산 빼돌리기 실태는 이처럼 예금보험공사 ‘재산조사실’의 추적을 통해 밝혀진 것이다.

 양 팀장은 “모두 수억원을 호가하는 물품”이라며 “부실 금융회사 대주주 가운데는 재산을 빼돌리고, 여전히 떵떵거리고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예보 ‘재산조사실’은 ‘저축은행 사태’를 불러온 저축은행 등 부실 금융회사가 숨겨놓은 예금·주식·부동산 등을 찾아 국가로 환수하는 일을 맡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공적자금을 투입하게 한 부실 금융회사의 은닉재산을 찾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2001년부터는 검찰과 함께 자금 추적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재산조사실이 최근 5년간 환수한 금액은 총 1000억원에 이른다. 이렇게 확보한 은닉재산은 5000만원 초과 예금자 등에 대한 파산배당 재원으로 활용된다.

  은닉재산과의 ‘숨바꼭질’에서는 우연히 발견한 조그만 단서가 실마리를 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올해 초 A사의 대출서류를 다시 들춰보던 한 조사관은 서류 귀퉁이에 쓰인 조그만 메모를 발견했다. 회사와는 관련 없는 낯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조사관은 이 인물과의 거래내역을 토대로 계좌 및 수표 추적에 나섰고, 이 인물이 A사 차명계좌의 주인인 사실을 확인했다. 양 팀장은 “명의를 빌려준 인물을 찾기 위해 가족 관계는 물론 고향, 출신 중·고교 등을 뒤져 회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찾아낸다”며 “이런 작업이 길게는 1년 가까이 걸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해외 송금 절차가 간소화되면서 재산을 미국 등 외국으로 빼돌리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를 적발하기 위해 예보는 미국에 은닉재산 환수전담반을 개설하고, 주요국 한인 밀집지역을 수시로 방문하고 있다.

 최근에는 은닉 수법이 치밀해지면서 내부자 신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비리를 제일 잘 아는 건 역시 내부 인물인 만큼 그들의 자발적인 고발을 유도하는 것이다. 예보는 은닉재산을 신고하는 제보자에게 최고 5억원의 포상금을 지급하는 ‘은닉재산신고제’를 운영 중이다. 지난 10년간 179건의 신고를 접수해 290억원을 회수했다. 제보자는 직장 동료와 친인척이 전체의 30%를 차지한다.

 부실 금융회사 대주주의 단골 수법은 차명계좌·주식을 보유하거나 다른 사람 명의로 부동산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이다. 합의이혼한 뒤 부인 앞으로 부동산 등 재산을 빼돌려 세상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고가의 골동품이나 미술품·서화 등도 숨기기 쉽고, 값이 크게 떨어지지 않아 재산을 감춰놓는 데 자주 이용된다. 구속된 김민영 전 부산저축은행 대표는 월인석보 등 보물 18점과 고서화 등 문화재 1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었다. 김찬경 전 미래저축은행 회장은 미국 추상화가 사이 트웜블리의 ‘무제(볼세나)’, 박수근 화백의 ‘노상의 사람들’ 등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채규철 전 회장은 1900년대 초 제작된 에디슨 축음기를 비롯해 명품 오디오와 스피커 수백 점을 보관해오다 적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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