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사물놀이서 한수 배웠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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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태양극단의 '큰어머니' 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있는 연출가 아리안느 므누슈킨(Ariane Mnouchkine.62) 이 '제방의 북소리' 를 10월 12~17일 국립극장 야외극장 특설무대에 올린다.

므누슈킨은 '공동 창작 연극' 의 거장으로, 일찍이 동양의 전통극에서 현대 연극이 나아갈 좌표를 발견한 '브레히트적인 인간' 이다. 연극을 통해 민중을 끊임없이 일깨우며 윤리와 도덕의 문제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도 서사극의 창시자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닮았다.

므누슈킨의 '제방의 북소리' 은 동양 전통연희 양식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동양적 색채가 농후하다. 1999년 프랑스 파리의 뱅센 숲속 공원에 있는 태양극단의 본거지 카르투슈리극장에서 초연됐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뤼스 이리가레와 함께 대표적 페미니즘 이론가 중 한명인 엘렌 식수가 극본을 썼다. 므누슈킨의 오랜 동지인 식수는 이 작품을 무려 1천번 이상을 고쳐썼다고 한다. 일행은 이달 일본 신국립극장 공연을 마치고 국립극장 초청으로 내한한다.

37년 역사의 태양극단은 '극단(劇團) 의 예술' 을 지향하는 독특한 문법으로 세계 연극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므누슈킨은 배우들이 '무중력 상태' 의 완벽에 이를 때까지 훈련를 거듭한 뒤 공연하기로 악명이 높다. 이런 원칙 때문에 '제방의 북소리' 의 초연이 봄에서 가을로 옮겨지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제방의 북소리' 는 '배우가 연기하는 인형극 양식의 고대 동양이야기' 이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옛날 연극의 형식을 빌어 오늘의 배우들이 연기하는 인형극이다.

일본의 전통 인형극 분라쿠(文樂) 와 중국의 경극(京劇) , 인도의 전통 무용극 카타칼리에서 기본 형식을 차용하고, 그 위에 한국적인 리듬을 입혔다.

집단 창작 원칙을 심화하기 위해 전 단원들이 한달 이상 아시아 투어(한국.일본.타이완.베트남) 을 하며 '동양배우기' 를 했다.

특히 므누슈킨은 98년 아비뇽연극제 '한국의 밤' 을 장식한 김덕수 사물놀이에 매료돼 이듬해 한국을 방문해 사물놀이를 배웠으며, 제목의 모티브가 된 '북소리' 를 체험하기 위해 아예 김덕수패의 한재석을 파리로 초청해 사사했다.

작품의 배경은 6백년 전 중국과 일본 사이의 아시아 국가. 도성에 홍수가 나자 신관(神官) 과 제관(祭官) 은 대책회의를 연다.

이들은 홍수의 원인이 벌목권을 독점한 왕의 조카에 있음을 지적한다. 강물은 점점 불어나고 급기야 제방의 한켠을 무너뜨려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도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수만명 농민의 근거지인 벌판쪽을 터뜨려야 한다.

1998년 중국 양쯔강(揚子江) 의 대홍수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은 적대적 모순관계에 있는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비천한 자 등을 통해 선악과 인간 욕망의 문제를 깊이 통찰한다. 인형으로 분장한 배우들이 나와 약호화한 행동(컨벤션) 을 보이며 이동하고 연기한다.

아무래도 도드라진 분라쿠의 양식과 색감 때문에 한국 관객들은 '왜색(倭色) ' 에 질릴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우리가 홀대한 동양 전통에 대한 서양인의 창의적 재해석은 주목해야 한다.

므누슈킨은 러시아 출신 영화감독 알렉산드르 므누슈킨의 딸로 1959년 파리대학생 연극협회를 창설하고 그 협회의 운영을 맡으면서 연극인생을 시작했다. 61년 '징키스칸' 으로 연출 데뷔했으며, 동양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식수 원작의 '캄보디아의 왕, 시아누크' (85년) 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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