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18기 정치국위원 열전 ②]‘붓(筆杆子)을 든 남자’ 류치바오(劉奇?)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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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5월12일 오후 2시28분 쓰촨(四川)성 원촨(汶川)대지진이 발생했다. 류치바오(劉奇 ·59) 쓰촨성 서기는 즉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회의를 30분만에 끝냈다. 곧 SUV에 몸을 싣고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으로 달려가면서 그는 7가지 지시를 내렸다. “신속히 사상자를 구출하라. 재해지역 주민을 안전지대로 대피시켜라. 난민들의 의식주 대책을 세우라. 생명과 안전 중시를 몸소 실천하라 등등” 눈길을 끈 지시는 마지막 일곱 번째였다. “언론기관은 정확하게 여론을 선도하라.” 선전부 관리들은 그의 뜻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날 밤 류치바오는 성 주요 간부들을 세 부류로 나눠, 제1팀은 6대 재해지역으로 즉시 이동할 것, 제2팀은 두장옌(都江堰)에 현장지휘부를 구축할 것, 제3팀은 청두(成都)에 대기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류치바오는 제1임무는 재해구조이며, 재해구조의 제1임무는 생명구조임을 강조하고 ‘감정’을 실어 구조활동을 펼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지진 발생 당일 공안청에 교통로 확보에 주력할 것을 명령했다. 지진 초기 구호품이 적재적소에 배급될 수 있는 길을 닦은 것이다. 이상은 2008년5월22일자 ‘쓰촨일보’가 묘사한 쓰촨 대지진 발발 당시 류치바오의 활약상이다.

과거 자오쯔양(趙紫陽) 공산당 총서기가 중난하이 입성에 성공한 것은 쓰촨성 서기 당시 ‘쓰촨경험’으로 불리는 경제개혁 업적 때문이었다. 류치바오 역시 자오쯔양에 이어 중난하이 입성에 성공할 것인지 주목을 받고 있다.

18차 당대회 후 공산당 중앙선전부장에 임명된 류치바오는 앞으로 5년간 13억 중국인들이 보고 듣고 읽는 것들을 총감독한다. 마오쩌둥은 물론 린뱌오(林彪)도 선전 업무를 고도로 중시했다. 그는 일찍이 “붓과 총은 정권 탈취의 두 가지 무기(兩杆子)이고, 정권을 공고히 하는 두 가지 무기다”라고 말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지만, 총구만 가지고서는 집권당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의미다. 물리력을 동원해 사회안정을 유지하는 정법위의 위상이 18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급에서 정치국원급으로 낮아졌다. 그만큼 선전부장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열이 있는 중앙서기처에서 류치바오가 중앙조직부장 자오러지(趙樂際)에 앞선 것도 이를 방증한다.

류치바오는 59세로 시진핑(習近平)과 동갑이다. 19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 진입이 유력한 인물이다. 류는 1953년 1월 안후이(安徽)성 쑤쑹(宿松)현에서 태어났다. 공청단파의 대부 후진타오(胡錦濤)와 같은 안후이성 출신이다. 학부는 안후이사범대 역사과를 졸업했다. 1992년 지린(吉林)대 국민경제계획 및 관리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류치바오는 안후이성에서 출세 기반을 닦았다. 1983년 8월부터 1985년 11월까지 공청단 안후이성 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현 광둥성서기 왕양(汪洋)의 선임이었다. 당시 후진타오는 베이징에서 공청단 중앙의 제1서기를 맡고 있었다. 류치바오는 이 때 후진타오와 업무 외에도 개인적인 신뢰관계를 돈독히 쌓았다.

류는 1985년 11월 베이징으로 상경했다. 이후 8년간 공청단 중앙의 업무를 수행했다. 리커창(李克强)에 이어 공청단내 서열 2위의 인물이었다. 93년 공청단을 떠나 1년간 ‘인민일보’ 부편집장으로 근무했다. 선전계통의 경력은 이때 쌓았다. 94년부터는 6년간 국무원 부비서장을 역임했다. 2001년 11월 광시좡족(廣西壯族)자치구 부서기로 지방 근무를 시작했다. 2006년 6월 자치구 서기로 승진했다. 승진 1개월도 안되어 ‘환북부만경제포럼’에 참가해 ‘광시진흥신전략구상’을 발표했다.

광시진흥신전략구상은 ‘환북부만경제협력구역’과 메콩강 유역의 준지역경제협력회의를 양 날개로 하고 난닝(南寧)-싱가포르 경제회랑을 축으로 하는 ‘중국-아세안지역 일축양익(一軸兩翼) 구조’라는 거대 지역 발전전략이다. 이 구상에 기반해 광시 북부만경제구는 ‘일축양익’의 중심이 됐다. 광시자치구는 이 구상을 통해 새로운 도약의 전략적 돌파구를 찾았다.

류치바오가 광시좡족자치구 서기에 취임하면서 제시한 발전전략은 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 브루네이 등 동남아 여러 국가를 포괄하는 다국적 프로젝트다. 이들 나라들은 각각 특색을 가진 항만그룹, 산업그룹, 도시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광시자치구는 중국과 이들 나라와 경제무역의 중간지대에 위치한다. 이 구상의 교량이자 중추로 역할을 맡게 된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재선 성공 이후 첫 순방지가 동남아였다. 미국의 합종책에 대비한 연횡책의 밑밥을 놓은 이가 바로 류치바오였던 셈이다.

원자바오 총리는 당시 광시 지역을 시찰하면서 “범북부만경제협력구상의 추진은 큰 과제이자 중요한 전략적 문제다. 현시점은 시작에 불과하다. 발전은 지금부터의 과제다”라고 지적했다. 2008년 3월에는 류치바오가 제출한 ‘범북부만경제협력구역’ 계획을 중앙이 정식으로 인가했다. 류치바오가 뿌린 씨가 싹을 틔운 것이다. 그는 곧 2007년 11월 쓰촨성 서기로 영전했다. 광시 프로젝트는 기업가출신의 궈성쿤(郭聲琨)이 이어받았다.

류치바오는 쓰촨으로 이동해 청두(成都)와 충칭(重慶)을 잇는 신특구 건설과 도시-농촌 일체화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라는 과제를 떠맡았다. 그러나 부임 반 년 만인 2008년 5월 쓰촨성 대지진이라는 사상 유래 없는 재난이 터졌다. 그는 사상 초유의 대형 자연재해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베이촨(北川)중학의 붕괴로 많은 학생들이 희생됐다. 당시 콩비지[豆腐渣] 날림 공사 탓에 학생들이 희생됐다는 비판이 쇄도했다. 류치바오는 여론의 비난을 성공적으로 무마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류치바오의 선전부장 취임은 기존에 사상·문화·선전 업무를 장악했던 리창춘(李長春)-류윈산(劉雲山) 라인이 류윈산-류치바오 체제로 바뀜을 의미한다. 장쩌민 계가 은퇴하고 후진타오 계가 들어왔다.

류치바오는 후진타오 파벌의 핵심이다. 한때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 류치바오가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부인 류융칭(劉永淸) 여사의 친척동생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하다.

이번 18차 당대회에서 후진타오의 완전 퇴진으로 리커창을 위시한 공청단파는 크게 위축됐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다. 후진타오 키즈들은 5년 후를 노리고 있다. 2017년 리위안차오(李源潮), 왕양과 함께 류치바오가 상무위원 진출에 성공한다면 19대에서는 리커창을 포함해 공청단파가 다수가 될 수 있다. 류치바오의 향후 5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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