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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언론 숙정·통폐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러한 자기혁신의 길이 아무쪼록 큰 희생과 마찰을 빚음이 없이 순리적으로, 그리고 법의 테두리를 일탈함이 없는 방향에서 원만히 추진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언론이 보다 공공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고…언론본래의 사명에 충실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발전으로 통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
우리는 새시대를 맞아 새로운 언론질서의 형성을 바라는 정부의 종용에 언론이 호응함으로써 이번 언론 통폐합 정비가 국민의 화합과 단결이라는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역사에 떳떳하고 자랑스런 언론의 자기혁신이었다는 기록을 남길 수 있기를 바라며…』
80년11월15일 통폐합의 제물이 된 신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이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자신의 숨통을 스스로 죄도록 강요받고 난 직후 게재한 사설로는 너무나 믿기지 않는 글이었다.
아무리 언론검열하의 글이었지만 너무 차분하고 양순한 표현이었다.
같이 당한 언론의 논조도 완곡하게 유감의 뜻을 담고는 있었지만 그 엄청난 현실에 비해서는 보잘것 없는 저항이었다. 죽으면서도 꽥소리 한번 못지른 꼴이었다.
언론사가 이렇게 능멸 당하는 상황이니 언론인 개개인에 대한 조치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언론계의 수난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10월 유신으로 침묵을 강요당했던 언론은 74년부터 자유언론·민주언론을 향한 몸부림을 시작했다.
『언론자유 보장하라』는 유신초기 대학가의 데모구호가 76년에 들면서 『언론인은 각성하라』로 바뀌고 78년 이후에는 『언론인은 자폭하라. 매춘언론 물러가라』는 것으로 변화하는 과정속에서 언론인들의 자성과 번뇌는 깊어져갔다.
박정희독재체제아래서 불발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자유·민주 언론운동은 10·26으로 유신이 종말을 고하며 활기를 찾았다.
그러나 그때도 비상계엄하였기 때문에 본격적인 움직임은 「80년의 봄」을 기다려야 했다.
80년의 봄, 전국을 휩쓰는 민주화 열기속에서 그해 정초부터 타오르던 자유·민주 언론운동은 거세게 번져갔고 각언론사는 언론자유구현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제도언론」 「매춘언론」이란 오명을 감내하며 내연하던 열기가 일시에 분출한 것이다.
그러나 그 언론자유·검열철폐요구는 검열때문에 일체 보도되지 못했고 정권탈취의 야욕을 굳힌 군부 주도세력은 언론장악의 필요성을 한층 절감했다. 때문에 신군부 세력들은 언론에 대한 고삐를 더욱 강하게 죄어갔다. 이같은 대언론 강압분위기 속에서 발생한게 당시 중앙일보 태백주재 탁경명기자 구타사건이었다.
80년5월6일, 탁기자는 그해 4월 발생한 사북 동원탄좌소요사건 관련 광원들의 연행과정을 취재하던중 수사요원들에게 끌러가 뭇매를 맞고 「대검고문」을 당했다. 다음은 탁기자의 당시회고.
『5월6일 저녁 8시쯤입니다. 각사 기자 50여명은 수사본부가 차려진 정선경찰서로 떠났으나 이날중 소요주동 광원들을 연행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낟아 있다가 사북읍사무소에 몰래 잠입했읍니다.
합수단은 읍장실에 지역개발대책회의를 구실로 주동광원들을 불러 모은뒤 연행하려 했었지요. 다른 광원들을 자극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였읍니다. 예정대로 합수단 요원들이 광원 13명을 연행할때 카메라를 들이댔읍니다. 그 순간 개머리판이 제 어깨를 찍었고 그들은 나를 광원들과 함께 대기중인 버스로 데려갔읍니다. 얼마를 맞았는지 모릅니다. 몇시간이 지난 뒤 버스에서 어느 연병장으로 끌어내리고는 이른바 「대검고문」을 시작했읍니다.
목 양옆에 대검을 들이대 꼼짝못하게 하고는 1시간동안 「작전을 망칠뻔했다」며 제보자를 대라고 했읍니다. 무릎을 끓게한 뒤 구두발로 뭉개가면서…. 나중에 고문사실을 발설치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다음 돌려보내줬읍니다.
법원에 입원중일 때도 구두발짝소리에 놀라 한동안 나자신도 모르게 변소등 외진 곳에 숨어있다 정신을 차리는 등 심한 노이로제증상에 시달렸죠.』
(탁기자는 이 사건이후 결국 속을 썩인 「미운 오리새끼」로 점찍혀 삼청교육대 입소명단에 올려졌다가 현지 유지들의 반대로 모면했으나 그해 7월말 언론인숙정때 해직됐다 87년에 복직돼 현재 중앙일보 사회부차장으로 근무중이다)
이같은 사실이 본사에 알려지자 중앙일보는 5월7일자 석간에 이를 게재했다.
하지만 계엄사 검열단은 단 한줄도 실을수 없다며 전부를 삭제시켰고 이에 중앙일보는 이 부분을 비워둔채 「백판」으로 제작, 1판을 배포했다. 당시로선 유례 없는 검열에 대한 항거였다.
백판인쇄는 가장 소극적인 저항인 것 같았으나 실은 가장 적극적인 투쟁이었다.
검은 지면 한가운데 5단 크기로 허옇게 발행된 지면은 대서특필된 어떤 기사보다도 호소력이 컸고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놀란 계엄당국은 2판부터 단순사실보도만을 허가했고 이희성당시계엄사령관은 중앙일보 김승한주필에게 전화를 걸어 『구타한자를 색출해 구속, 엄중 문책토록 지시했다』고 양해를 구했다.
이 사건이 일선요원의 단순한 실수가 아닌 언론에 대한 상징적 적대행위임을 확인한 기자협회는 이사령관에게 책임자 엄벌과 재발방지 조치를 강력히 요구했으며 중앙일보와 TBC기자 2백여명은 「자유언론 실천의 밤」을 개최, 자유·민주 언론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각언론사 기자들의 자유언론결의대회가 계속되던 5월14일 학생데모를 취재하던 조선일보 김동현기자등 기자8명이 경찰로부터 폭행을 당함으로써 대언론 적대행위는 여전히 계속됐다.
이에 기자협회는 5월16일 긴급간부회의를 열어 20일 0시를 기해 계엄검열을 전면 거부키로 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계엄당국에 대한 정면도전의 선전포고가 내려진 것이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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