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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언론 숙정·통폐합|힘으로 밀어붙인 지방사 정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80년 언론통폐합은 납득할만한 기준 없이 신 군부가 힘으로 밀어붙인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중앙일간지와 방송은 물론 대부분의 지방지가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책임자와 신 군부의 핵심세력들은 일부 언론사의 경영이 부실했고 사이비언론 운운하지만 실상은 그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달랐다. 평생 군에 있던 사람이 사회를 보는 좁은 시각으로 어마어마한 일을 재단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이 같은 얘기는 당시 주역들도 지금은 시인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이 국가적 위기였고 그것을 군이 앞장서 극복했다는 것을 인정한다하더라도 공무원 숙정·삼청교육·언론통폐합 등은 분명히 잘못된 정책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혁명적 상황 운운하며 마치 당시에 저지른 일들이 잘된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허문도)도 있으나 대부분의 주역들은 앞으로 국회증언을 통해 시대적 상황 설명 못지 않게 결과에 대해 사과·사죄하는 입장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신아일보의 경우 당시 군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내부적으로 경영에 별문제가 없었다. 당시 어느 부국장급 간부는 『많은 신아일보 기자들이 통폐합이 되고 난 후 본간을 고대했고 다른 사로 간 사람도 오랫동안 강제폐간에 응어리를 안고 살았다』고 말했다. 더욱이 장기봉 사장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같은 대구 공고출신이라 기대를 걸었었다는 소문은 짐작이었을 뿐 장사장과 전씨는 일면식 조차 없는 사이였다고 한다.
80년 지방언론사들은 대부분 속수무책인 상태에서 당했다.
1도1사란 명분아래 원칙도 기준도 없이 자의로 찢어 발겼다. 그러다 보니 경영규모가 컸던 회사가 합병된 예가 있고, 하루아침에 먹고 먹히는 관계가 뒤바뀐 경우도 있는가하면 땡전한푼 못 받고 송두리째 회사를 빼앗긴 사례도 있었다.
경영상태가 좋았던 신문이 먹힌 대표적인 예가 부산의 국제신문이었다. 국제신문관계자들의 증언.
『당시 국제신문과 부산일보는 부수 등 여러 면에서 사세가 비교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언론계는 물론 부산시민들까지 국제가 먹히리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겁니다. 국제는 럭키그룹이 경영했고 부산은 5·16장학재단이 주인이어서 특별히 한쪽이 보호받아야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구태여 말하면 국제가 논조 등에서 약간 센 편이었지요.
특히 10·26 다음 날자 신문 사회면 톱 제목을 「민주발전만세」로 달았다가 몇 명이 보안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그 이후 몇 번 그와 비슷한 일로 당시 검열관이던 최모 소령이 군복을 벗은 예가 있었습니다.
국제 측이 특별히 로비하지 않았던 것은 상식 선에서 일을 처리하리란 기대와 함께 당시 문교장관이었던 이규호씨가 「국제는 괜찮다」고 확언을 해주었기 때문이죠. 이씨는 구자경 회장과 진주고 동기였으니까요.
서울지사에서는 이런 저런 소문이 잡혔지만 부산본사는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있는 이장관의 말을 믿고 그냥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1월 12일 오후 5시쯤 서울지사장을 맡고있던 이형기 국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러왔습니다. 국제가 먹힌다는 전갈이었습니다.
순간 회사는 난리가 났고 부랴부랴 정순민 부사장이 서울 럭키본사로 연락하는 등 법석을 떨었습니다.
사장 구자학씨는 그해 1월에 사임해 공석이었고 주월 맹호부대 사령관 출신인 정부사장과 최내림 전무가 회사 일을 다 꾸려나갔지요.
서울에 확인을 하느라 진땀을 빼고있는 사이 자정쯤 부산보안부대에서 「임계두」라는 사람이 전화를 해왔습니다. 정부사장과 최전무, 그리고 총무국부국장 3명이 밤 12시가 넘어서 보안대로 갔습니다.
정부사장 등이 허모 중령 방에 앉자마자 허중령은 서류를 꺼내 놓으며 서명을 요구했고 정부사장은 「안 된다」고 버티었습니다. 허중령은 「정부방침이니 서명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답니다.
2시간여를 버티다가 결국 정부사장이 서명했고 새벽 3시 가까이 되어서야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통폐합 각서에 서명은 받았지만 부산일보가 덩치 큰 회사를 인수하기는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결국 재무부에서 국제인수를 위해 부산일보 측에 지원을 해주어 이중 9억8천만원을 주고 회사를 가져갔습니다. 국제신문 종간호의 1면 톱 제목은 「어 추워」였습니다.』
전남매일은 그들이 전남일보를 인수하는 줄 알고있었다가 막바지에 처지가 바뀌고 말았다.
전남매일 관계자들의 증언.
『통폐합을 한다는 소문이 나자 모든 정보망을 동원해 알아봤지요.
10월말께 서울의 군 관계자로부터 전남매일이 전남일보를 흡수 통합하게 되니 조용히 있어도 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 사람 말로는 「보안사에서 현지 여론조사를 해보니 전매가 전일보다 반응이 좋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조용히 조치가 내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11월이 되고 통폐합이 임박해졌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엉뚱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전남매일이 전남을 흡수하기는 하는데 주식은 전남이 51%, 전남매일이 49%를 갖는다」는 해괴망측한 얘기를 현지보안부대로부터 들었습니다.
심상우 사장(작고)은 말도 안 되는 결정이라며 현지보안사 책임자에게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상법상 49%는 아무 힘이 없거든요.
그러다가 11월 12일 서울보안사령부로부터 심사장한테 급히 올라오라는 연락이 왔고 심사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에 올라가 항의하면 바뀔 수 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보안사 쪽방에서 서명을 요구하는 보안사 소령을 잡고 얘기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노릇이었고 심사장은 결국 49% 각서에 서명하고 내려왔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전남매일이 안심하고 있는 사이 중앙의 언론계 등에 발이 넓던 전일 측은 그런 저런 인연을 총동원해 손을 썼다더군요. 우리가 광주사태 진압 후 검열관의 보류지시에도 불구하고 「아 광주여 우리들의 십자가여」라는 시를 실었는데 이 신문 10부씩이 청와대·보안사 등 서울 요로에서 검토대상에 올려졌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심사장은 신문사를 되찾겠다는 생각에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1대 국회에 진출했습니다.
심사장은 국회에 들어가 허문도 비서관 등을 상대로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오히려 심사장이 갖고 있던 49%의 주식마저 회수하려는 압력이 들어왔습니다.
급기야 당시 이상재 민정당 사무차장이 나섰고 이차장은 정내혁 국회의장을 앞세워 통폐합 1년만인 81년 11월 23일 국회의장실에서 심사장과 전일 측의 김종태 광주일보사장간에 합의를 붙였습니다.
심사장은 주식 49% 대금으로 25억원을 요구했지만 15억원 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전남매일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통폐합에 대한 대통령의 결재가 나기 이전에 이미 보안사 측은 지역별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등 통폐합을 위한 사전준비작업을 했고 특히 결재이전에 현지 보안사 측이 통폐합 내용을 미리 당사자에게 귀띔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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