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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언론 숙정·통폐합|보안사 역할 놓고 엇갈린 증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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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언론통폐합에 관한 비화가 하나하나 밝혀지자 새삼 당시 보안사의 역할에 관해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사령관이 어느 날 갑자기 대통령이 되고 덩달아 참모인 대령들이 청와대의 요직을 차지하는 등 보안사는 사실상 제5공화국의 산실이었다. 때문에 크게 보아 80년에 있었던 온갖 혁명적 조치들은 보안사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이제 와서 보안사가 언론통폐합에 개입했느냐, 안했느냐가 문제되는 것은 당시 당사자들의 책임문제가 시비의 대상이 되고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저금까지 그들 내부에는 「우리」로 통하던 사람들 사이에 책임전가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허문도씨는 통폐합정책의 구상·입안은 자신을 포함한 청와대 관계자들이 했지만 집행과 언론인해직은 계엄사(사실상 보안사)가 했다고 한 반면, 보안사의 이상재씨는 자신은 계엄하 언론검열업무만 맡았을 뿐 통폐합이나 해직문제를 다룰 입장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공교롭게도 80년 8월 전두환 사령관이 대통령에 나서게 됨에 따라 후임사령관에 노태우 장군이 됐기 때문에 꽤 민감한 문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허문도씨는 사령관의 교체와 관계없이 보안사가 힘과 책임을 가진 집행기관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노사령관 밑에서 참모를 지낸 사람들은 사령관의 교체와 함께 보안사의 역할은 아주 미미하게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당시 청와대 핵심 비서관의 증언.
『해직기자문제는 사회정화차원에서 보안사와 국보위사회정화위가 했습니다. 그때 허씨는 국보위 문공분과위와의 척결작업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던 때였어요. 그러나 통폐합만은 그가 입안하고 보안사의 이상재씨가 권정달 정보처장의 지시를 받아 실효한 것으로 압니다. 허화평·허삼수씨는 허씨 생각에 동조해준 일종의 후견인이었습니다. 이상재씨는 계엄사의 대 언론 창구였고요. 특히 지방언론사 정리는 보안사가 조정역할을 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통폐합의 최종결재서류에는 구체적인 지방사 정리문제가 없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전사령관과 참모들이 청와대로 옮겨가고부터 보안사가 별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그때가 계엄 하인데 상식적으로 납득이 갑니까. 당시 분위기는 최고권력자의 마음을 읽고 각 기관들이 점수를 따려고 경쟁적으로 움직였던 때 아닙니까. 군 출신이 아닌 허문도씨는 보안사와 이상재씨를 직접 움직일 힘이 없었어요.
전대통령이 이광표 문공장관에게 결재를 하면서 보안사로 하여금 집행하라고 한 겁니다. 당시 보안사가 이에 대해 불쾌감을 피력하거나 할 입장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사령관 시절 보안사간부 K씨의 증언.
『언론통폐합은 청와대에서 계획되고 입안된 것으로 보안사는 지시에 따라 시행했을 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보안사 핵심세력 등 실세는 모두 청와대로 흡수됐기 때문에 언론통폐합 집행부분은 결정기관의 수족기관이랄 수 있는 보안사가 맡았던 것입니다. 왜 보안사에 집행을 맡겼느냐는 점에 대해선 전대통령이 친정인 보안사가 자신의 의도대로 1백% 움직일 뿐 아니라 비정상적이고 힘든 일일수록 보안사에 맡기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믿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보안사간부 L씨의 회고.
『이 문제를 보안사가 떠맡은 것처럼 되어있지만 실제는 청와대에서 벌여놓은 일을 뒤처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노사령관은 불쾌해 했지만 예정된 각본에 따라 던져진 일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보안사에 이 문제와 관련한 자료가 하나도 보관된 것이 없는걸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한용원 당시 정보처장(권정달씨 후임)과 김충우 대공처장(이학봉씨 후임)의 증언도 마찬가지. 『노사령관은 자기들이 했으면 자기들이 마무리짓지 왜 보안사에 떠넘기느냐고 참모들에게 얘기했어요. 경찰·안기부 등이 있는데 왜 구태여 우리가 맡아야 하느냐고 했지요. 언론사 발행인들로부터 각서를 받는 일은 보안사 실무진들에 의해 아주 기계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이 업무는 계엄 하 산적한 업무 중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10월초 보안사의 청와대보고에 배석했던 청와대 비서관의 증언은 뉘앙스를 크게 달리한다.
『보안사내에 언론통폐합을 연구한 팀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여론조사도 하고 전문가와 관계자들의 얘기도 들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실제로 당시 언론사는 보안사가 주무르지 않았습니까. 통폐합결재를 세 번 올렸다고 국회에서 허씨가 증언했는데 그가 직접 올린 것은 두 번이고 세 번째는 노사령관도 배석한 자리에서 보안사의 권정달 정보처장이 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다른 관계자의 증언.
『이날보고는 브리핑 차트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전대통령이 보고를 받는 도중 참석자들에게 토론을 부쳤지요. 그러나 토론이 길어지고 결말이 쉽게 나지 않자 전대통령이 토론을 중단시키고 재가를 보류했습니다. 거절당한 것이지요. 이날 보고가 왜 보안사의 권처장이 하게됐는지는 잘 몰랐습니다. 당시 분위기가 최고권력자로 자리를 굳힌 전대통령에게 서로 점수를 따려고 했던 분위기여서 보안사가 언론통폐합을 들고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이미 뜻을 굳히고 추진 중에 있던 허씨 측에서 보안사 쪽을 시켜 뜻을 이루려고 했던 것인지 둘 중 하나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보안사는 통폐합의 시작에서 끝까지 모두 개입했으며 특히 지방사의 통폐합은 이상재씨가 중심이 된 보안사의 작품이라는 것이 허씨 쪽의 증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당시 한 청와대 간부의 증언.
『경기신문의 케이스에서 볼 수 있듯이 대통령의 통폐합 재가이전에 이미 보안사에서 언론통폐합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갖고 있었음이 틀림없어요. 특히 통폐합 집행과정에서의 지방언론사 처리내용을 추적해보면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의 경우 인수사와 피인수사가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최근 보도에서 확인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전남매일의 주식이 전남일보로 넘겨진 것은 1년 후인 81년 11월입니다. 그렇다면 1년간 집행기관이었던 보안사가 개입해 조정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지방사의 통폐합처리는 집행과정에서 상당기간 잡음이 계속된 것으로 압니다.』
보안사내에서 지방사 통폐합에 관한 구체적인 안을 독자적으로 수립했는지 여부는 앞으로 진상이 규명돼야할 핵심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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