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9)<제자 김동익> 제59화 함춘원 시절 (10) 인술「대물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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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선배들을 회고하면서 흥미 있는 사실 몇 가지를 발견해냈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심지어는 손자까지 함춘원 동창인 경우가 꽤 많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지금껏 함춘원에서 후학양성에 전념하고 있는 그들을 대할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다.
해가 바뀌면 으례 내게 세배하러 오는 안용팔 박사(49년 서울의대 졸·현「가톨릭」의무원장)의 모습에서 그의 부친 안남규씨(18년 졸)의 넘치는 의욕과 의사로서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4년 간의 독일유학으로 박사학위를 획득한 안 선배는 귀로에「런던」서 처녀 취항한「퀸·메리」호를 타고「뉴욕」에 도착했는데 미국신문에 안남규 박사 등 3백 명이 승선했다는 기사가 실려 온 장안에 화제가 됐던 기억이 난다.
안 선배의 성이「알파벳」A로 시작되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임명재 선배의 경우는 그의 아들(임정순·현재 서울대의대 내과교수)에게 전공까지 물려준 셈이다.
l919년 경의전을 졸업하고「이와이」(암정)교수 밑에서 오랫동안 냇과를 수련한 뒤 서울안국동에서 개업한 임 선배는 심호섭씨·고영순씨(대판의대 출신)와 같이 당대 3대 내과 의사로 손꼽힌 분이다.
임 선배는 우리나라 내과의사의 양성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일인「이와이」교수의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조선총독부 의원부속 의학강습소가 경성의학 전문학교로 탈바꿈한 19l6년에 졸업한 선배들은 거의 모두가 개업으로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보살폈는데 남여백씨와 고달승씨는 각각 그의 아들에게 의업을 계승시켰다.
졸업 후 평양서 개업한 남 선배의 아들 남기용씨는 48년에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지금 서울대의대 생리학 교수로 함춘원을 지키고있다.
고달승씨의 경우 3남4녀 중 고창섭씨(49년 서울대의대 졸)와 고창순씨(서울대의대 내과교수·서울대학병원부원장), 그리고 손자 고기영씨(고창섭씨 아들·71년 서울대의대를 졸업하고 현재 미국에서 활약)가 대를 이어 함춘원 동문이다.
교통의학회 회장을 지낸바 있는 고 선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대변검사를 통해 장내기생충을 찾아낸 공로를 세웠다.
내과 전문의원이라는 간판을 처음으로 내건 김용채씨와 명「콤비」로 당시 장안에 이름을 날렸던 조한성씨(17년 졸)도 그의 아들 조형상씨(52년 서울대의대 졸·현재 중앙대의대 마췻과 교수)와 함춘원 동창이다.
조 선배는 우리가 경의전에 다닐 때 관수동에서 개업하고 있었는데 욋과 의사로서 그의 인기는 굉장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편 지성주씨(19년 졸) 집안은 4대가 의업을 계승하고 있어 퍽 인상적이다.
지 선배의 아버지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종두를 보급하고 1899년 설립된 대한의학교 교장으로서 의사양성의 기틀을 마련한 우리 의료계의 선각자 지석영 선생이다.
일제에 항거하면서 한편으로 서울 낙원동에서 개업생활을 했던 지 선배는 그의 강자 지홍창씨(전 대통령 주치의·48년 서울대의대 졸), 손자 지무영씨(「가톨릭」의대 졸)에게 의업을 계승시켰다.
참으로 보기 드문 의사집안이라고 하겠다.
고문룡씨(21년 졸)의 경우도 그의 아들 고광도씨(고대의대 내과 교수)가 45년 경의전 출신이다.
대인관계가 좋고 호걸로 주위의 인기를 모았던 고 선배는 일본경도제대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28년) 8·15직전까지 만주에서 개업하다가 해방 후 인천도립병원장·마산도립병원장·수도육군병원 냇과 과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나와 입학동기였는데 3·1만세사건으로 한해 졸업이 늦어졌던 김병선씨의 아들도 함춘원 출신이다.
지금「가톨릭」의대 생리학 교수로 연구와 후진양성에 여념이 없는 김철 박사는 김 선배의 뜻을 받들어 경성제국대학의학부를 졸업(42년), 서울대의대 생리학 교수로 있다가「가톨릭」의대로 옮겼다.
김 선배는 그의 고향인 함남 리원에서 개업하다가 내가 수련을 받고있던 경성제대 대학병원「이와이」냇과에 들어왔기 때문에 나와는 가까운 사이였다.
나도 내 아들 명환이와 함춘원 동창인데 그는 지금 국립경찰병원 원장으로, 냇과의사로 활약 중이어서 자못 기대가 크다. 선배들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으리라.
물론 내 선배들에 대해서 모두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이 글에서 본의 아니게 빠진 분도 없지 않을 것이다.
어떻든 이들 선배들에게서 발견되는 한결 같은 공통점은 그토록 의료봉사에 열중하고 또 대성황을 이루면서 개업을 했으면서도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윤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의료계의 현실을 보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인술을 베풀었던 선배들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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