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여인’ 대처의 추억… 작은 정부의 시대 가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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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호 22면

경제는 호황·불황의 사이클을 반복한다. ‘콘트라티에프 파동’이라 불리는 50년 정도의 경기 대순환 주기를 보면 대체로 불황은 짧고 호황은 길었다. 그러나 호황이 끝나는 시점에서는 골 깊은 경기 침체가 있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재즈 시대(Jazz age)’ 호황을 보낸 이후 세계경제는 대공황을 경험했다. 1950, 60년대 번영기가 끝나자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복병이 들이닥쳤다.
요즘의 경제위기는 70년대 경기 침체 이후 40여 년 만의 세계적 침체다. 연초 개봉된 영화 ‘철의 여인’은 70년대 말 극심한 경기 침체기에 총리가 돼 영국을 이끈 마거릿 대처 이야기다. 대처 집권기의 영국은 ‘황혼의 제국’이었다. 경제의 전반적 생산성은 떨어지고, 무역불균형이 오일쇼크와 맞물리면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메릴 스트리프가 분(扮)한 대처 총리는 결단력 있는 모습으로 영국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여걸로 그려진다. 메릴 스트리프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의 대처는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지만 실제 80년대의 영국은 오히려 작은 정부를 지향했다. 집권 직전 83%에 달한 최고 소득세율은 40%까지 낮아졌고, 국영기업들은 속속 민영화됐다. 대처는 관료보다 시장의 힘을 믿었다. 미국에서도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해 대처와 비슷한 방식으로 경제를 운용했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비판은 있지만 70년대의 경기 후퇴는 시장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앞서 30년대의 대공황은 시장이 아닌 국가의 힘으로 극복됐다. 뉴딜이라는 강력한 경기 부양책이 시행됐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나라가 책임진다는 복지국가론이 확립됐다. 정부가 할 일이 많으니 세율도 치솟았다. 30~40년대 대다수 서구 선진국의 소득세 최고 세율은 90%를 웃돌았다. 이런 분위기는 70년대까지 이어졌다.
요즘 직면한 경제위기를 시장이 주도해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니면 국가가 주체가 돼야 할까. 논란은 있지만 근래 후자에 무게 중심이 실리고 있다. 정부가 과도한 긴축정책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세계경제 전망 보고서에서 재정의 승수 효과를 1.7배로 추정했다. 정부지출을 줄이면 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지출 축소분의 1.7배에 달한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그리스 등 재정부실 국가에 강력한 긴축을 요구한 IMF의 종전 입장과 사뭇 다르다. 이달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 때도 긴축 일변도 정책이 가져올 부작용을 경고했다. 선진국 정부들은 재정 지출을 확 줄이지 않는 대신 증세를 통해 재정 건전성을 유지할 것이다. 증세는 광범위한 과세 확대가 아니라 여유 계층에 집중 과세하는 형태일 것이다. 경제 운용 때 정부 역할을 중시하는 케인스주의(Keynesian) 경향이 강화될 조짐이다.
미국의 경우 주식 매매 차익이나 배당 소득 등 자본차익에 대한 증세가 확실시된다. 부유층에 대한 세율 인상도 정치권의 주요 논의 사항이다. 한 달 뒤면 탄생할 우리나라 새 정권도 ‘작은 정부’를 지향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 쏟아져 나온 복지공약만 봐도 가계와 기업의 세 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역할 증대로 인한 부작용이 도마에 오를 것이다. 정부의 지출확대가 민간의 투자위축으로 이어지는 구축효과(crowding-out effect) 우려도 있다.
경제를 움직이는 주된 동력은 때로는 시장에서, 때로는 국가에서 나왔다. 요즘은 다시금 정부의 역할이 강조되는 시대다. 아울러 이런저런 규제도 기승을 부릴 것이다. 2~3년 전만 하더라도 대형마트 영업규제 강행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은행업도 주주가치 못지않게 공공성이 중시되면서 주가 흐름이 더욱 부진하다. 투자도 시장논리 이외에 경제관료의 의중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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