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지식] 15세기 선비의 원예 가이드 … 꽃에서 세상을 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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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조선 초기 문신이자 서화가인 강희안(1418~65)은 꽃과 나무를 가꾸며 “천지 사이에 가득 찬 만물은 서로 연관돼 있으며 참으로 오묘하게 모두 제 나름대로의 이치가 있다”고 했다. 오른쪽 사진은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눌와]

양화소록
강희안 지음
서윤희·이경록 옮김
눌와, 224쪽, 1만6000원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대표화가 강희안(1418~65)은 당대에 삼절로 꼽혔다.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그의 시·글씨·그림이 매우 드물다. 그의 친구인 서거정(1420~88)에 따르면, 강희안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명예를 구하지 않고 감추었기 때문이란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강희안이 꽃과 나무를 기르며 쓴 글인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나마 그를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양화소록』은 그의 동생 강희맹이 편집한 네 권짜리 가문의 문집 『진산세고(晉山世稿)』 넷째 권에 실린 것이다. 강희안의 글 가운데 드물게 지금까지 전해지는 글이다.

 중국의 옛 문헌에 나오는 원예에 관한 기록을 인용하고, 각 화초를 돌보며 느낀 소회와 소나무·대나무·매화·배롱나무(자미화) 등 17종의 꽃과 나무 재배법 등을 기술한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원예서로도 꼽힌다.

 대상이 꽃이든, 동물이든, 혹은 사람이든 모든 관계 맺기는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길인 법. 꽃과 나무를 기르는 기술을 적은 글에 인간과 세상사를 바라보는 그의 깊은 시선이 향기처럼 배어 있다.

 그는 옹기에 연꽃을 기르며 “사람이 한세상을 살면서 명성과 이익에 골몰하여 고달프게 일한다면 죽음에 이를 때까지 끝이 없을 것”이라며 잠시라도 틈을 내 진한 연꽃 향기를 즐기는 일 역시 소중하다고 적었다. 또 사람들이 꽃의 품종에 대해 잘 모르고 이름을 잘못 부른다며 “같고 다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참과 거짓이 서로 뒤섞이는 것이 어디 꽃의 이름뿐이겠는가. 세상의 일이 모두 이와 같다”고 한탄했다.

 귤나무를 키우면서는 “아! 풀과 나무는 무지한 사물에 불과하지만, 잘 재배하면 이처럼 무성해진다. 하물며 군주가 신하를 등용하면서 친하고 소원한 것을 따지지 않고 은혜와 사랑으로 관계를 맺는다면 어찌 충성을 다해 나라를 보위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요즘 경영 관련서에서 너도나도 부르짖는 리더십의 원리가 이 한 문장에 오롯이 담겨 있는 셈이다.

 강희안은 세상에 너무 일찍 태어났던 사람이었다. 제각기 다른 꽃과 나무의 습성 등 ‘디테일’을 살피고, 창의적으로 해석하는 그의 안목이야말로 요즘 시대가 요구하는 기질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자로서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붙였지만,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됐다가 풀려나 한직으로 물러났다.

 화초 기르기는 그때 그를 버티게 한 ‘셀프 힐링’이 아니었을까. 비록 마음은 멍들었지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서 그는 세상과 우주를 읽어냈다. 한문으로 쓰여진『양화소록』은 70년대에 번역돼 출간됐고, 99년에 발간됐다 2쇄를 찍고 곧바로 절판됐다. 600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그가 다시 말을 걸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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