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더 자랑스러운 코리아를 위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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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세상에 이런 나라가 없다고 한다. 대통령 선거가 한 달도 안 남았는데 후보조차 확정이 안 된 이런 ‘바나나 공화국’ 같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거품을 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게 뭐 그리 대수인가. 이왕 참은 것, 며칠만 더 기다리면 대진표가 확정될 것이고, 그때부터 “준비~땅” 하고 정책과 공약, 인물 검증을 몰아치기로 하면 된다. 뭐든지 단시간에 후다닥 해치우는 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전통이고 장기 아닌가.

 나이 들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만 나는 요즘 정말로 우리나라가 자랑스럽다. 젊은 시절,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란 사실이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소위 선진국이란 델 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가 한반도 상공에 들어서면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잿빛 산하와 그 안에서 부대끼며 사는 우리의 일상이 그렇게 초라하고 암울해 보일 수 없었다. 옛날 얘기다.

 며칠 전 국제회의 때문에 캄보디아에 잠깐 다녀왔다. 이른 아침 인천공항에 내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인천공항과 자유분방하게 그곳을 드나드는 수많은 코리안들, 시원하게 뻗은 공항고속도로와 깔끔하게 정돈된 주변 풍경을 바라보면서 대한민국 여권을 가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뿌듯했다. 솔직히 요즘에는 미국이나 유럽 어디를 가도 별 감동이 없다.

 전화(戰禍)와 분단의 상처를 안고 다시 시작한 나라. 부존자원 하나 없는 가난한 나라. 미군이 던져주는 초콜릿을 놓고 다투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로 끼니를 때우던 나라.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느니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게 낫다는 저주 속에 출발한 나라. 그런 코리아가 불과 반세기 만에 많은 나라의 부러움을 사는 나라가 됐다.

 자신은 헐벗고 굶주려도 자식들을 가르치고, 그 힘든 노동과 굴욕을 참아내며 가족을 부양하느라 고생한 우리 부모들이 그래서 나는 눈물겹게 고맙다. 개척자 정신으로 사업을 일구고 키워온 기업가들과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 나라의 기틀을 세운 엘리트 관료들이 고맙다. 모진 고통을 감수하며 민주화를 위해 애쓴 사람들이 고맙고, 구로공단에서 피땀 흘린 누이들이 고맙다.

 이승만과 박정희에서 노무현과 이명박까지 역대 대통령들도 고맙다. 다들 나름의 시대적 소임을 다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공(功)이 있으면 과(過)도 있기 마련이다. 과는 과대로 기억하되 공은 공대로 인정해야 한다. 이미 잊혀진 존재가 되다시피 한 이명박 대통령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국가의 대외적 위상을 끌어올린 공로만큼은 인정해줘야 한다.

 지금 ‘빅3’가 대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조만간 ‘빅2’로 좁혀질 것이다. 누가 되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 새로운 정치를 열망하는 국민적 기대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양극화 해소란 시대적 과제에서 이미 빅3는 큰 기여를 했다. 누가 돼도 정치 개혁은 미룰 수 없을 것이고, 복지정책의 강화와 일정 수준의 경제민주화는 불가피할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와 저출산율 세계 1위가 대변하는 우리의 팍팍한 현실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체제의 존립이 위협받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진전이다.

 얼마 전 중국에서 열린 ‘2012 베이징 포럼’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이 시대가 당면한 다양한 주제를 놓고 전 세계에서 모인 석학과 전문가들이 토론을 벌이는 일종의 지식 박람회였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저명한 경제학자 에밀리오 오캄포 교수의 발표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그는 한때 1인당 국내총생산(GDP)으로 따져 세계 6~7위를 다투던 아르헨티나가 지금은 60위권의 중진국으로 추락한 결정적 이유를 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실패한 정치권의 무능과 나태에서 찾았다. 단순한 부(富)의 이전에 의존하는 포퓰리즘적 접근법으로 계층 간 갈등을 조장하고, 제도적 기반을 약화시킴으로써 아르헨티나의 성장 기반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란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소득 불균형과 경제력 집중의 완화가 필요하지만 자본주의의 버팀목인 혁신과 기업가 정신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뿔을 고친다고 소를 죽이는 우는 범하지 말란 얘기다.

 시대적 요구에 맞춰 합리적으로 룰을 조정하고, 일단 정해진 룰은 누구도 예외 없이 지키도록 감시하는 것이 차기 대통령의 역사적 소임이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누가 다음 대통령이 돼도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더 자랑스러운 나라가 될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