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웃 위한 사회적기업이라도 수익 있어야 지속 가능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SK가 지원하는 사회적기업 행복F&C의 ‘해피스쿨’에서 요리 실습을 하는 청년 교육생들. 20여 명이 1년간 배우는 과정이다. [사진 SK]

세계적 베스트셀러 제3차 산업혁명의 저자인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교수. 지난 5월 방한한 그는 청년실업에 고통을 겪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스스로 사회적기업(social enterprise)을 만들어 내라고 권유했다. 세계적 사회공헌(CSR) 재단 미 아쇼카(Ashoka)의 빌 드레이튼 창업자는 “물고기를 잡아 주거나 잡는 법을 가르치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이런 일을 하는 좋은 사회적기업을 키워 수산업 전체 생태계를 한 단계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에선 2007년 사회적기업 육성법이 시행되면서 관 주도로 관련 사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근래 SK·삼성 등 대기업들이 사회공헌의 방편으로 사회적기업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취약계층을 고용해 적절한 이윤도 남겨 이를 다시 재투자하는 선순환 구조, 즉 CSR 3.0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SK 사회적기업 ‘오늘’, 1석3조 노린다
지난 9일 서울 동빙고동의 SK ‘행복나눔재단’. 현관에 들어서자 ‘해피뮤지컬스쿨’이란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2층에는 레스토랑 ‘오늘’, 3층엔 ‘해피쿠킹스쿨’이 있고 4·5층 재단 사무실에 이어 6층에 i(혁신)룸이 들어서 있었다. 해피스쿨은 이 재단의 사회적기업인 행복F&C가 어려운 가정 젊은이들에게 요리사나 뮤지컬 배우, 자동차 정비사 교육을 해 주는 사업이다. 김선경 재단 교육팀장은 “1층 140여 석의 뮤지컬 스튜디오와 3층 20여 석의 조리장에서는 주5일 각각 20여 명의 젊은이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실습교육을 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3층 해피쿠킹스쿨로 올라가자 앳된 얼굴의 젊은 남녀들이 프랑스 음식 전문가 서승호 셰프의 밀착 지도를 받으며 요리 실습을 하고 있었다. 수강생인 최지혜(20)씨는 “요리학원을 다녀봤지만 이처럼 장인급 요리사가 실제 식당처럼 음식을 주문하고 결과물을 평가해 주는 곳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 달 졸업 후 프랑스 식당에 취업할 계획이다. 졸업생 중에는 해피스쿨의 주선으로 제법 규모 있는 레스토랑에 취직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이 중견 셰프가 되면 다시 해피쿠킹스쿨에 와서 후배 양성 재능기부를 하게 된다. 요리사 교육부터 취업에 이르기까지 선순환하는 CSR 생태계인 셈이다.

2층 한식당 ‘오늘’로 내려가 봤다. 신라호텔·보광휘닉스파크 요리사 출신의 박정석 총괄주방장을 비롯해 12명의 셰프가 맛깔스러운 한식요리를 만들어 내는 곳이다. 마침 이곳에서 오찬을 하던 김신배 SK 부회장을 조우했다. SK의 사회공헌 총괄인 그는 메뉴판에 단풍잎 표시(특별메뉴)가 된 계절요리 ‘문어해초쌈’을 가리켰다. ‘완도산 참문어에 남해안 해초와 갈치속젓을 곁들인 요리’라는 설명이 있었다.

행복F&C 소속인 식당 ‘오늘’은 SK 사회적기업이 지향하는 세 가지 임무를 지녔다. 김 부회장 설명에 따르면 첫째, 한식의 정통성을 발굴·보존·홍보하는 일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미슐랭 요리사들이 이곳 요리를 맛보고 명품 한식당 반열에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식재료부터 디자인까지 한국 문화가 물씬 풍긴다. 둘째, 가정형편이 어려운 젊은이들을 한식 장인으로 키운다. 셋째, 이익을 내서 해피스쿨 교육과 식당 사업에 재투자한다.

SK는 국내 굴지 기업집단 중에서 사회적기업 육성에 대한 의욕을 가장 많이 보이는 편이다. 2010년부터 총 13개의 사회적기업을 설립해 연인원 1000명 이상을 고용했다. 고령자·장애인과 다문화·경력 단절 여성, 저소득층 청소년들이 ‘행복한 도서관’ ‘행복한 도시락’ ‘행복한 방과후 학교’ 등에서 일한다. SK는 최근 KAIST와 사회적기업가 육성을 위한 ‘사회적기업가 센터’를 설립해 ‘사회적기업 경영자 과정(MBA)’을 개설했다. ‘사회적기업가 사관학교’를 세운 셈이다. 유항제 재단 총괄본부장은 “연내 MBA 수강생 25명을 뽑아 내년 2월부터 사회적기업가로 키우겠다”고 말했다.

SK는 또 사회적기업을 해외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신사업으로 정했다. 최태원 SK 회장은 지난 3일 중국에서 열린 ‘베이징 포럼’에서 경제 양극화와 실업 같은 세계적 당면과제를 해결하는 데 사회적기업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기업은 이윤 동기로 움직이지만 궁극적으로 사람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그 해법은 사회적기업이다. 전 세계 사회적기업 관련 투자자·기업가를 연결하는 온라인 플랫폼 ‘글로벌 액션 허브’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김신배 부회장은 “2014년까지 유엔과 세계은행 같은 국제기구와 글로벌 프로젝트를 추진할 예정”이라고 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최 회장에게 글로벌 사회적기업 사업에 앞장서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국내 양대 그룹인 삼성과 현대자동차도 사회적기업에 큰 관심을 보인다. 삼성은 다문화가정의 취업과 저소득층 학생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글로벌투게더’는 각 지역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연계해 특화된 취업·창업교육을 개발하고, 지역 특성에 맞는 수익사업을 펼쳐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지원한다. 지난해 3월 충북 음성에 ‘글로벌투게더 음성’, 올 6월 전북 김제에 ‘글로벌투게더 김제’를, 9월 경북 경산에 ‘글로벌투게더 경산’을 잇따라 세웠다. 음성에서는 카페사업을, 김제와 경산에서는 화훼사업을 한다. 현대차는 장애인 보조기기를 생산하는 사회적기업 ‘이지무브’를 지원한다. 2010년 이 회사 설립 후 지난해까지 22억여원을 투자했다.

인건비뿐 아니라 운영 노하우 지원해야
2010년 이전 우리나라 사회적기업 육성은 관 주도였다. 민간에서 사업 아이템을 들고 오면 고용노동부를 중심으로 인증을 해 주고 예산을 나눠 주는 식이어서 무늬만 사회적기업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 실제로 수익모델에 대한 철저한 검증 없이 인건비 지원이 방만하게 이뤄진다는 비판도 있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09년까지 정부가 인정한 사회적기업 297곳 중 영업이익을 낸 곳은 24%에 불과했다. 2010년에 사회적기업은 491곳으로 늘었으나 영업이익이 난 곳은 14%로 더 줄었다. 김정열 한국사회적기업협의회 상임대표는 “사회적기업의 자생력을 기르려면 수익모델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컨설팅 등 진일보된 지원체제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부 용역으로 사회적기업 연구를 한 곽선화 부산대 경영학과 교수는 “공공시장 참여처럼 사업의 경쟁력과 자립성을 높일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09년 국내 사회적기업 총매출 2355억원 중 공공부문 매출은 541억원으로 20% 수준이다. 독일은 사회적기업 매출의 90%가 공공시장에서 나온다. 우리나라에선 의무조항은 아니고 우선구매 대상으로 돼 있다. 일반 민간기업과 최저가낙찰제 아래서 경쟁하면 초창기 사회적기업이 제대로 크기 어렵다.
정부도 정책 손질을 검토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경영컨설팅·연구개발·판로와 관련된 지원을 늘리는 방안도 추진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원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