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건 두 판결 … ‘기름값 담합 손배소’ 정반대 결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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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SK에너지·GS칼텍스·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사가 2004년 4~6월 담합해 기름값을 올렸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07년 4월 이를 적발해 정유사들에 과징금 526억원을 물렸다. 그러자 1100여 명의 트럭 운전사가 “담합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높은 값에 기름을 샀으니 손해를 배상하라”며 수개월 간격으로 두 개의 소송을 냈다. 각기 이웃한 재판부에 배당된 두 민사사건의 재판 결과가 최근 나왔다. 사건 내용은 물론이고 원고들의 직업, 청구 취지, 변호인까지 동일한 소송인데 결론만 정반대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1부(부장 최승록)는 지난 8일 김모씨 등 트럭 운전사 526명이 SK에너지·현대오일뱅크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운전사 1명당 50만원씩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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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다음 날인 9일 같은 법원 민사22부(부장 지상목)는 이모씨 등 또 다른 트럭 운전사 583명이 정유사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담합으로 인해 발생한 손해액이 적정하다고 볼 수 없다”며 원고 청구를 기각했다. 담합은 인정하지만 손해 배상액 계산을 잘못했다는 취지다. 두 재판부는 소송의 쟁점인 ‘싱가포르 석유시장 가격(MOPS)’을 두고 판단이 달랐다. MOPS는 원고 측이 손해액을 따질 때 사용한 국제기준 유가다. 정유사는 환율을 반영한 MOPS에 관세·유통비용·이윤 등을 더해 국내 시장에 기름을 판다. 민사21부는 “국내 경유시장과 싱가포르 현물시장의 상관관계가 낮다고 보기 어렵다”며 MOPS를 인정했다. 반면에 민사22부는 “완전경쟁 시장인 싱가포르와 과점 시장인 한국을 동일 선상에 두고 비교할 수 없다”고 봤다.

 원고 측이 경유 사용량의 근거로 내민 세금계산서에 대해서도 민사21부는 “일부 미흡하지만 믿을 만하다”고 판단했다. 반면에 민사22부는 “구입시기·구입량 등이 명확하지 않아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원고 측 변호를 맡은 서상범(42) 법무법인 다산 변호사는 “같은 사건에 대해 법원이 다른 판결을 내려 당황스럽다. 패소한 사건에 대해선 항소할 예정”이라며 “미국의 경우 담합 피해와 관련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해자가 ‘어느 정도’ 합리적인 수준에서 손해를 증명하면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법원 관계자는 “정유사의 기름값 담합에 대해 민간인 피해자들이 낸 첫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라며 “상급심 재판부의 판단이 주목된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해 4월 유가가 급등했을 당시 정유사의 기름값 담합 여부 조사에 나서 MOPS와 국내 유가의 추이 등을 비교했지만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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