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의 입' 9년] 12. 수출 100억달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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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1977년 수출 100억달러 달성 기념식에서 박정희대통령(오른쪽)이 한 기업인에게 ‘6억달러 수출탑’을 시상하고 있다.

내가 청와대 대변인으로 재직한 5년간(1971~75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표적인 격랑의 시기였다. 한국군이 참전하여 도와주었던 베트남이 결국 패망(74년)하는 등 안보 위기감이 한국을 짓눌렀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한 저항이 거셌다.

그런 가운데 경제적으로는 성취감과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성과가 풍성했다.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70년대를 유사 이래 처음으로 잘 살았고 활기찼던 시기로 생각한다고 나는 믿는다. 가까이에서 국정을 지켜볼 수 있는 청와대에서 내가 목격한 큰 사회 변화 중의 하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신분관계였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거꾸로 상공농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양반제도 같은 것은 아니지만 생활 속에서 사농공상이 유습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이것이 변한 것이다.

경제개발 때문이었다. 100억달러 수출 고지로 달려가면서 중소 상공인들은 천지개벽할 정도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가 만든 제품의 견본을 꾸려들고 외국시장으로 뛰쳐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외국 문화를 접한 이들은 생활.사고방식 차이에서 오는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 자신들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상공인들에게는 모든 게 도전이었다. 제품 가격의 협상 방식과 계약 체결 절차 등 매사가 새롭고 어려웠다. 그러나 상공인들은 거의 선천적으로 소질을 발휘하면서 처음 해보는 수출 업무를 너끈히 해치웠다. 그들은 옛적부터 전해내려오던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가격 협상의 기술을 익힌 것이다.

이 변화는 천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변화였다. 이렇게 하여 가능하게 된 것이 100억달러 수출(77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사농공상이 거꾸로 뒤집혔다고들 했던 것이다.

상공인들의 이런 노력과 성취는 박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박 대통령은 언젠가 나에게 불쑥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수출하는 무역업자들이야말로 민주주의자라고 해야할 것 같아." 나는 무슨 뜻인지 잘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대통령은 말을 이어갔다. "저 사람들은 가격을 흥정할 줄 알지 않나. 흥정이 깨지면 물건을 팔 수 없게 되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성사시키려 노력할 것이고, 그러려면 서로 타협해야 하지 않겠는가. 민주주의의 요체는 타협이야. 민주정치도 결국은 타협을 어떻게 잘 하느냐에 달려있는 거야." 나는 속으로 '상공인들의 행태에서 이런 정치적인 것을 읽다니…'라며 감탄했다.

박 대통령은 계속 말했다. "그런데 김일성은 확실히 민주주의와는 담을 쌓은 인간이야." 이것 또한 사실이었다. 김일성은 68년 7월 대남 담당요원들과의 대화에서 "계급적 원쑤(수)들과는 타협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적과 타협한다는 것은 혁명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김일성의 유훈을 받들어 선군(先軍)정치를 하고 있는 김정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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