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살리기 급하다] 1. 경제난국, 기업에서부터 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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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인점 이마트를 주력사업(전체 매출의 66.5%)으로 하는 신세계는 최근 몇년간 이익이 두배 이상 늘어나는 급성장을 했다.

그러나 현재 12개인 점포를 늘릴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다. 1백99.9%인 부채비율 때문이다. 정부가 정한 상한선 2백%를 겨우 맞추고 있다.

할인점의 속성상 상품을 외상으로 사는데, 이게 채무로 잡혀 부채비율을 높이고 있다.

이달 초 정부가 부채비율 2백% 규제를 업종.기업별로 완화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식분석가들은 신세계의 주가가 더 오를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이마트 점포를 늘려 더 커나갈 수 있다는 분석이다.

부채비율 규제는 빚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영을 막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원래는 금융기관이 대출심사 때 각자 알아서 판단할 문제다.

그러나 외환위기 후 정부가 2백%라는 획일적 기준을 만들어 이를 지키도록 강제했다. 그러다 보니 신세계처럼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 회사조차 영업을 확장하지 못하는 족쇄가 돼 버렸다.

지난 7월 5일 서울 힐튼호텔. '공정거래 자율준수 규범' 제정 선포식을 마친 뒤 오찬에서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朴회장이 "30대그룹 지정제도를 10대그룹으로 축소할 용의가 없느냐" 고 먼저 포문을 열었다. 李위원장은 이에 대해 "재계가 30대그룹제도를 '오해' 하고 있다" 고 반박했다. 30대그룹으로 지정돼도 실질적으로 출자총액 제한만 받을 뿐이며 이나마 예외조항이 많기 때문에 기업활동에 별 장애가 없다는 게 李위원장의 주장이었다.

朴회장은 "이 제도 때문에 투자가 위축되고 많은 기업이 힘들어하는데…" 라며 정부와 시각 차이를 안타까워했다.

출자총액제한은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막기 위해 1987년에 도입됐다. 30대 재벌의 경우 그룹 내 계열사에 출자한 금액이 순자산의 25%를 넘지 않도록 규제한 것이다. 그러다 분사 등 기업구조조정을 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취지에서 98년 2월 폐지됐으나 1년6개월 만인 99년 8월 부활됐다. 재벌들이 외환위기 후에도 정신차리지 못하고 무분별한 기업 확장에 나서고 있다는 게 부활한 이유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경제 보고서에서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독특하게 출자총액 제한.부채비율 규제를 갖고 있다" 며 "이런 정책들은 시장지향적 경제로 이행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고 지적했다.

기업 활동을 가로막는 장애는 이런 법적 규제 뿐이 아니다. 세금에 버금가는 준조세, 열악한 사회간접자본(SOC), 지지부진한 구조조정, 불안한 노사관계 앞에서 기업들은 의욕을 잃고 있다.

정부는 기업 투자가 부진하자 '설비투자금액의 10%를 기업이 내야 할 세금에서 깎아주는 업종을 현재의 22개에서 30개로 늘리겠다' 는 복잡한 방침을 정해 다음달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업들의 반응은 뜨겁지가 않다.

4대 그룹의 한 계열사 사장은 "요즘처럼 기업이 불신을 받고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리스크가 따르는 일은 아예 안하는 게 상책" 이라며 '대우 쇼크' 를 거론했다.

거대 기업인 대우까지 하루 아침에 쓰러진 마당에, 가뜩이나 모든 면에서 투자 환경이 열악한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었다. 실제로 금리는 건국 이래 최저수준으로 떨어져 있으나 기업들의 설비투자용 대출은 오히려 줄고 있다.

최근 한국은행과 삼성경제연구소가 각각 기업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투자를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돈' 이 아닌 '경기' 의 문제로 응답했다.

지금 경기가 부진하기도 하지만 언제 회복될지 불투명해 섣불리 투자에 나설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방은 불신과 불확실성을 걷어내는 데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서강대 조윤제 교수는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해 한계기업은 빨리 정리하고, 살 수 있는 기업이 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시장기능을 회복시키는 것과 기업을 믿는 것" 이라고 지적했다.

국가 경제의 성패는 기업에 달려 있다. 미국 등 강대국은 물론 핀란드.네덜란드 등 강소국들이 강하게 된 밑바탕에는 강한 기업이 자리잡고 있다.

GDP 규모가 우리와 비슷한 네덜란드가 파이낸셜 타임스 선정 5백대 기업 중 14개를 보유한 반면 우리는 4개에 불과하고, GDP 규모가 우리의 4~5분의 1인 핀란드.싱가포르도 2, 3개씩 갖고 있다.

연세대 정갑영 교수는 "기업이 수익을 낼 수 있는 환경을 정부가 만들어줘야 한다" 며 "재정지출을 늘리고 금리를 낮추는 것보다 기업이 스스로 의욕을 갖고 사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훨씬 효과적" 이라고 말했다.

기업이 '의욕 상실' 상태에 놓이면 나라가 활력을 잃고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수밖에 없다. 기업이 활기를 되찾아야만 경제도 살아날 수 있다. 경제난국을 풀어나가는 실마리가 기업의 활기를 되찾아주는 일에서 풀려야 하는 이유다.

기업 의욕상실 →금융기관 부실화 →금융시장 경색 →기업 사정 악화 →경기침체 심화로 이어지는 현재의 악순환 고리는 기업을 살리는 것에서부터 끊어야 한다.

특별취재팀=김시래.이세정.홍승일.김남중 기자
srkim@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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