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 ‘신호등 표시제’ 의무도입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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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식품업계 최대 화두는 ‘신호등표시제’다. 말 그대로 식품에 신호등 색깔인 빨강·노랑·초록 색깔을 표시해 영양성분에 대한 위험성을 알리자는 취지다. 표기되는 영양성분은 당·지방·포화지방·나트륨 등 네 가지다. 예컨대 탄산음료의 경우 당류에 빨간색이 표시되고, 지방·포화지방·나트륨은 초록색으로 표시된다.

신호등표시제가 처음 도입된 건 어린이 비만 문제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어린이 비만률은 13.5%로 심각한 수준이다. 이에 2007년도에 어린이 식생활 안전관리 특별법이 발의되고, 이 중 비만을 일으키기 쉬운 당류나 지방 섭취를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신호등표시제가 발의된 후 최근 의무화 단계까지 논의되고 있다. 신호등표시제는 언뜻 보기에 상당히 좋은 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처음 발의에서 현재 이르기까지 5년여 동안 검토 과정에서 상당한 문제점이 제기됐다. 정부가 신호등표시제를 추진하려는 의지도 강하지만 영양학회나 소비자단체 쪽에서는 의무 도입이 성급하다는 지적도 한다.학계·정부·소비자단체를 대표하는 전문가가 각계의 입장을 들었다.

정리=배지영 기자

반대- 음식을 이분법 논리로 표시하는 건 부당

문현경 단국대 식품영양학과 교수(한국영양학회장)

문현경

신호등표시제 의무화는 반대한다. 어떻게 음식을 OX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 있나. 우리는 식품 하나를 먹는 게 아니라 ‘식단’을 먹는다. 여러 종류의 식품을 다양하게 섭취해 하루 필요한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

 신호등표시제의 가장 큰 문제는 식품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당류 섭취 기준이 정확히 정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숫자를 기준으로 어떤 식품은 빨간색(위험)이고, 어떤 것은 노란색(주의) 또는 초록색(안전)이 된다. 이는 아이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줄 수 있다. 예컨대 학교 앞 불량식품 94%가 초록색으로 분류되는데 아이들이 이런 식품이 안전하다고 생각해 남용할 우려가 있다. 제로칼로리 탄산음료 역시 초록색인데 건강식품이라 생각해 매일 몇 캔씩 마신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어린이 비만 해소에도 도움되지 않는다. 학과 체육시간을 늘리고 식생활 교육을 하는 등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더 필요하다.

 식생활 교육도 선행돼야 한다. 영양표기 성분을 읽고 스스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중요하다. 색깔로 식품에 대한 편견을 심어줘서는 안 된다.

 현행 식품표시가 제품 뒷면에 작은 글씨로 표기돼 있어 읽기 힘들다면 주요 성분 몇 가지를 앞에 큰 글씨로 표기하는 ‘영양성분전면 표시제(GDA)’가 대안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신호등표시제 대신 GDA를 도입해 활용하고 있다.

찬성- 어린이 손쉽게 식품 정보 판단 위해 필요

김기환 보건복지부 식품정책과장

김기환

현재 어린이 기호식품은 영양성분 함량과 1일 영양소 기준치에 대한 비율을 단순 숫자로 나열하고 있어 어린이가 이를 쉽게 알아보기 힘들다.

 지난 5월 국무총리실이 주관하는 국가 정책조정 회의에서는 어린이 식생활 안전정책을 논의했다. 어린이가 쉽게 접하는 고열량·저영양 식품 등 일부 품목부터라도 신호등 표시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관계 부처들은 이를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신호등 표시제로 주요 영양성분을 표시하면 어린이가 식품을 선택할 때 손쉽게 영양표시를 알아볼 수 있다. 각자의 불균형한 영양 섭취를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식품업계에서는 표시의 지나친 단순화로 영양 교육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고, 어린이가 식품을 좋은 식품과 나쁜 식품 두 가지로만 인식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해당 표시제를 시행하면 매출이 감소할까 우려하는 게 더 큰 것 같다. 이 같은 우려는 긴 안목에서 보면 크게 문제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는 점점 소비자들이 기피하거나 우려하는 제품 생산을 피하게 될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우려를 감안해 표시방법이나 시행 대상 등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정하는 데 보다 폭넓은 의견수렴을 거칠 예정이다. 또 어린이나 부모에게도 효과적인 홍보와 안내를 해 신호등표시제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할 것이다.

보완- 성급한 추진보다 식품 교육 등 선행돼야

조윤미 녹색소비자연대 공동대표

조윤미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식품 구매 시 중요하게 보는 식품 표시는 유통기한·가격·원산지가 각각 1·2·3위이다. 열량 및 영양성분을 확인하는 비율은 3.5%에 그친다.

 때문에 식품의 열량 및 영양성분 표시의 가독성을 높이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신호등표시제는 표시를 단순화하고 색을 강조해 가독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영양성분 정보를 너무 단순화해 오히려 소비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가능성이 있다.

 어떤 식품은 고품질의 원료와 엄격한 제조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어도 신호등표시제 아래에선 오히려 먹지 말아야 할 식품군에 속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신호등표시제가 의무가 아니라 임의 제도로 시행될 때에는 제품의 특성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되면서 신호등표시제의 장점도 살려갈 수 있다. 하지만 의무 적용을 하면 오히려 식품선택에 혼란을 줄 수 있다.

 이 같은 한계 때문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신호등표시제를 제한적으로 활용해 장점만을 충분히 살릴 수 있도록 적용하고 있다.

 식품에 적용하는 영양성분 표시는 매우 보편적이며 합리적이어야 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돼야 한다. 한쪽 면만 지나치게 강조해 제도를 성급히 추진하다 보면 생각지 않은 오류들이 나타난다.

 신호등표시제 의무화를 성급히 도입하기보다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신호등표시제=식품의 당·지방·포화지방·나트륨이 각각 일정 수준 이상이면 빨강, 보통이면 노랑, 낮은 수준이면 초록색으로 표시하는 제도다. 각 성분에 대한 과학적 기준이 모호해 일괄 적용하기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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