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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짙어지는 미국 대선의 지방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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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정경민
뉴욕 특파원

미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민주주의 교과서다. 그런데 민주제의 가장 기본인 ‘1인 1표’ 원칙이 종종 무시되는 국가이기도 하다. 그것도 대통령선거에서. 표를 가장 많이 얻고도 낙선한 불운의 주인공이 1876·1888·2000년 세 차례나 나왔다. 이번에도 하마터면 그럴 뻔했다. 선거인단 수에선 민주당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공화당 밋 롬니 후보를 압도했지만 전체 득표에선 간발의 차로 겨우 이겼다.

 최근 몇 차례 선거를 보면 이런 불상사는 앞으로 더 잦아질 듯하다. 한국의 경상도와 전라도처럼 미국에서도 민주당과 공화당 지방색이 확연히 갈렸다. 유색인종이 많은 해안가 대도시는 민주당, 백인이 압도적인 내륙은 공화당 골수다. 그러니 미국 대선은 오락가락하는 10개 안팎의 ‘스윙스테이트(swing state)’라 불리는 경합주를 놓고 벌이는 ‘국지전’으로 전락했다. 상대방 ‘아성(牙城)’은 아예 거들떠볼 생각조차 않으니 지방색은 갈수록 더 짙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 대선이 이처럼 기형적이 된 건 태생에서 비롯됐다. 처음부터 한 개 국가가 아니라 독립된 여러 주가 모여 나라를 세우다 보니 민주제와 연방제를 섞은 ‘짬뽕’이 나왔다. 각 주 선거인단 수는 민주제를 따라 인구 비례로 배정하되 선거인단은 연방제 정신을 살려 각자 한 표가 아니라 전체가 각 주를 대표해 한목소리를 내도록 한 거다. 각 주 선거에서 이긴 후보에게 선거인단 표를 몰아주는 이른바 ‘승자독식(勝者獨食)제’다.

 선거인단제의 이면엔 거북한 진실도 숨어 있다. 남북전쟁 이전 남부 주엔 수백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 노예에겐 선거권이 없었지만 인구 비례로 정하는 선거인단 수 계산 땐 ‘5분의 3명’으로 인정받았다. 1787년 13개 주가 미합중국을 세울 때 북부 주가 양보한 결과다. 그 덕에 남부 주는 노예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고도 더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해 정부와 의회를 주물렀다. 이 좋은 제도를 남부 주들이 포기할 리 만무했다.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전체 득표수로 대통령을 뽑으면 한 표가 아쉬우니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줘야 했지만 선거인단제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각 주 인구통계를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던 것도 선거인단제를 택하게 한 현실적 제약이었다. ‘유령인구’를 줄이자면 득표수에 집착할 유인을 약화시켜야 했다. 지금은 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다. 각 주가 독립된 국가였다는 사실도 희미한 옛 추억이 됐다.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다. 메인주와 네브래스카주는 선거인단을 후보별 득표율에 비례해 배분한다. 표를 얻은 만큼 선거인단을 가져가니 1인 1표 원칙도 지킬 수 있다. 이번에도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잠시 힘을 얻었지만 오바마의 승리에 파묻혀버렸다. 그렇지만 지방색이 종국에 국론 분열을 가속화시킨다면 머지않아 낡은 미국 선거제도도 도마에 오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