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뒷이야기] 퀴리 부인과 아인슈타인 부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퀴리의 부인인 마리퀴리와 아인슈타인의 첫번째 부인인 밀레바 마리치를 아십니까?

>> 마리 퀴리와 밀레바 마리치는 여러 면에서 유사하답니다.

첫째, 어릴 때부터 과학적인 재능이 다분해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둘째, 자신과 같은 분야의 과학자와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남편이 모두 노벨상을 수상한 것입니다.

>> 좀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마리 퀴리는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남부 헝가리 치하의 세르비아인인 마리치 또한 어린 시절부터 능력을 발휘해 여성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김나지움 입학허가를 받았으며, 수학과 물리학 과목에서 1등을 했습니다.

1891년 파리로 유학간 마리 퀴리는 1894년 피에르 퀴리를 만났으며 이듬해 결혼했습니다. 목사도 신부도 부르지 않았고, 예물 반지도 없는 간단한 결혼식이었으며 신혼여행으로는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 시골마을을 여행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리치는 1896년 스위스 연방공과대학에 입학했고, 여기에서 4년 연하의 아인슈타인을 만나게 됩니다. 아인슈타인과 마리치는 상대성 이론에 관한 생각을 교환하는 등 학창시절 둘도 없는 학문적 동료로 지냈어요. 그들은 결혼 전에 딸을 낳기까지는 했으나 주위의 시선 때문에 아이가 없는 것으로 위장하다가 1903년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 전만해도 두사람의 인생은 비슷했는데... 결혼 이후 마리 퀴리와 밀레바 마리치의 학자로서의 인생은 크게 달라지게 된답니다.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 퀴리의 도움을 받아 검전기를 이용한 새로운 분석방법을 활용할 수 있었고, 결국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해 1903년 박사학위를 받는 동시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들 부부의 연구 환경은 매우 열악했지만 이런 악조건을 정열과 끈기,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꿋꿋하게 이겨냄으로써 얻은 영광이었습니다.

반면 밀레바 마리치는 아인슈타인과의 밀월여행 이후 사생아를 잉태한 심리적 부담 때문에 졸업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고 결국 박사학위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비록 박사학위는 포기했지만 아인슈타인의 파트너로서 연구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수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의 착상을 수학적으로 체계화시키는 데 아내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은 수학 분야에 체계적이지 못했으며 나중에도(그가 밀레바와 더 이상 공동작업을 하지 않게 된 뒤에) 자신의 착상들을 추론하고 수학적으로 옮기는 데에 있어 언제나 수학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5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들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유명해질수록 부부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1919년 결국 파경을 맞게 됩니다. 그 이후 밀레바는 정신질환자였던 둘째 아들을 위해 헌신의 세월을 보내다 1947년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결과적으로 20세기 초의 유능했던 두 여성 과학자는 각자의 파트너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운명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료제공 : 재밌다넷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