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서양이 연구한 동양철학 '금자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신간 『도의 논쟁자들』은 현대 서구의 중국철학 연구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표적 저작물이다.

동양철학은 동양인의 전유물이란 지역적 사고 또 동양철학하면 의레 비합리적이라며 폄하하던 고정관념을 훌쩍 뛰어넘게 하는 문제의 책이 이것이다.비교적 최근인 1989년 영국에서 처음 출간됐지만 중국철학사를 다룬 책으로 서양에서는 이미 고전으로 통한다.

흔히 '그래함' 으로 불렸던 저자 앤거스 그레이엄(1919~91) 의 동양 고전 해석 능력과 연구자세는 서양은 물론이고 동양의 연구자들에게도 귀감이 된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저술의 하나로 꼽히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유문화사) 의 저자 조지프 니담이 "내가 이제껏 만났던 고대 중국의 철학 학파에 대한 설명 중 가장 많은 자극을 주었으며 가장 놀라운 인식을 보여준 책" 이라고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앞서 펴낸 『후기 묵가(墨家) 의 논리와 윤리 그리고 과학』(Later Mohist Logic. Ethics and Science, 1978) 과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후기 묵?─뼈?다소 전문적 수준이라면, 신간 『도의 논쟁자들』은 철학에 관심있는 대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풀어썼다고 볼 수 있다.

신간이 다루는 범위도 후기 묵가뿐 아니라 유가.도가.법가 등 고대 중국 철학의 학파 전반을 아우른다.

그러나 두 책의 공통 요소이자 저자의 업적이기도 한 것은 바로 동양의 학계에서도 큰 공백으로 남아 있던 묵가를 치밀하게 재해석해 유가 중심의 전통적 관점을 탈피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유가가 승리한 것을 '정치적 승리' 라고 규정하고, 역사적으로는 패배한 후기 묵가와 장자를 중국 고대의 철학적 핵심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저자가 확장시킨 철학적 지형을 통해 고대 중국 철학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보게 하는 것이다.

이 책이 다루는 시기는 고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다. 당시는 동양적 사유의 원형이 형성된 시기로, 구체적으로는 기원전 500년에서 기원전 200년까지다.

백화제방하던 수많은 학파의 철학자들이 추구한 것은 한마디로 국가의 질서를 바로잡고 개인적 삶을 바르게 인도할 '도는 어디에 있는가' 였다.

이는 책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인데, 기실 도가(道家) 에서 도란 말을 많이 쓰고 있지만 도란 용어가 어느 한 학파의 독점물은 아니었다. 물론 도의 내용이 학파마다 다르고 기존의 연구는 그 내용의 차이를 밝히는 데 주력해 왔다.

그러나 저자는 그 내용 못지않게 그들이 '어떻게 사고했느냐' 라는 방법론에 주목하며 고대 중국 철학 속에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담론이 존재했었음을 밝혀낸다.

저자가 볼 때 합리적 논쟁의 중심엔 묵가가 있었다. 특히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2장의 '후기 묵가' 부분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도덕과 예의와 규율의 권위가 무너진 전쟁시대의 혼란상은 '왜 인간은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라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문제의식을 형성시켰다.

저자가 '형이상학적 위기' 라고 이름붙인 이 혼란상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지만, 저자는 특히 이름(名) 과 대상(實) 의 일치를 집요하게 추구했던 후기 묵가에 주목한다.

명실(名實) 이 상부하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은 이름을 붙이는 주체인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으로, 이것은 다른 학파의 논의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 아니면 선악의 혼재냐 등으로 나뉘며 궁극적으로 도덕성의 기준을 하늘(天) 혹은 자연에 두었던 다른 학파와 달리 후기 묵가에선 인간의 본성이나 하늘의 뜻 등을 중시하지 않는다. 묵가의 궁극적 목표도 역시 도덕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지만 그 방법론이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름을 제대로 붙여야 한다는 후기 묵가의 문제의식은 그들만의 단발적 목소리 그치지 않고 당시 철학적 논쟁의 보편적 주제였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과도 연결되고, 순자에선 아예 '정명(正名) ' 이란 한 개의 독립된 장이 설정돼 있으며, 또 노자의 도덕경 1장에 나오는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 ' 에 이르기까지 이름과 대상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묵가의 주도적 논쟁으로 대세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가 결코 사소할 수 없는 것은 맹자에서 보이듯 폭군을 왕이 아니라 필부로 부른다면 혁명의 당위성과도 연결되는 심각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동양적 정서와 역사를 무시한 채 합리와 논리라는 서양의 입맛에 맞춘 것이라는 비판도 할 수 있고 또 묵가를 합리주의로, 장자를 반합리주의자로 설정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묵가의 이론을 치밀하게 재구성해낸 저자의 역량과 함께, 중국철학을 서양철학과 대등하게 존중하는 가운데 도덕성과 관련된 서양철학의 한계를 동양에서 구하고자 했다고 고백하는 진지한 자세를 고려한다면, 저자의 연구는 합리적 근대를 사는 오늘날 더욱 주목받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번역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유가와 도가 등을 살펴 본 항목과 달리 후기 묵가의 경우엔 원문의 번역만으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눈에 띈다.

원문 자체가 암수표처럼 난해하기도 하고, 또 저자의 선구적 작업을 토대로 이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단계라 번역자의 탓만으로 돌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성(한신대 철학) 교수가 역자 후기에서 "후기 묵가 부분의 번역이 특히 어려웠다" 고 밝히는 정도로 넘어갈 것이 아니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