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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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귀를 씻고 세상 일 듣지 말꺼나

피에 젖은 아우성-김관식

저 바람 찬 농촌에서는 겨우 삼동이 지나면 더 무서운 보릿고개가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던 1950년대, 썩고 무능한 자유당 정권에 맞선 민주당의 구호는 '못살겠다, 갈아보자'였다.

그러나 한강 백사장에서 50만 인파를 모았던 야당의 신익희 후보가 급서하고 이승만 정부 아래의 서울의 명동은 가난뱅이들의 집합소였다. 명동골목에 들어서면 아는 얼굴과 부닥치고 돈이 없어도 다방이나 술집에 따라 들어가면 되고, 하는 맛도 있었지만 들어앉아 책 읽고 글쓸 방 한 칸이 제대로 없거나 있어도 가난이란 놈이 마음을 못붙이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은 시인.소설가의 면허장을 받은 문인이거나 아직 면허장을 받지 못한 문학도이거나 그저 만나면 반갑고 이내 십년지기나 되는 듯 흉허물이 없는 사이가 됐다.그렇게 만나서 등단도 하지 않은 내 습작을 처음으로 신문에 활자화 해준 사람이 시인 김관식이었다.

그는 김광섭 시인이 사장으로 있던 당시 세계일보의 논설위원으로 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 공초 선생을 찾아왔다가 내가 '청동문학'에 쓴 글들을 보더니 신문사로 놀러오라고 했다. 세계일보사는 남대문에 있었고 나는 마침 그 뒤쪽의 삼촌댁에 얹혀 살 때여서 겁도 없이 논설위원실로 찾아갔다.

그 방에는 고깔모자에 장삼을 입은 스님과 지팡이를 짚은 두 사람이 와 있었다. "근배야, 내가 좋은 시인을 소개해주지"하고 인사시켜준 한 사람은 '현대문학'에 서정주의 추천으로 갓 등단한 고은이었고, 한 사람은 '문학예술'로 나온 박희진이었다.

나는 '기적 이야기'라는 원고지 15장 분량의 3부작의 긴 시를 김관식에게 주었더니 바로 신문에 실어주었다. 뒤에는 콩트도 실어주는 등 내 없는 글재주를 사주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세상에서는 '양주동군!''박종화군!'하고 문단 대선배를 얕잡아 부른다 해서 객기를 부리는 기인(奇人)쯤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가 본 김관식은 당시 20대 후반의 젊은이답지 않게 조선조의 선비가 지녔던 정신적 체통을 담고 있었다.

육당 최남선에게서 한문을 배워 시를 1천수나 외는 신동이라고 했고, 서정주댁에 갔다가 그 집 처제에게 반해 음독소동을 일으키며 장가를 들었다는,그래서 서정주와 동서가 된 일화도 그다운 것이다.

4.19혁명 뒤의 어느 날 돌체음악실 앞에서 만난 김관식은 "근배야, 나 용산 갑구에서 장면군과 국회의원 대결하기로 했다.지금 석계향이 집에 정치자금 가지러 가는 길이다"하고 큰 소리를 쳤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헌법은 대통령 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뀌었고,차기 정부의 강력한 수상후보는 장면 박사였다.

설마 농담이겠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용산갑구에 출사표를 던졌고 '대한민국 시인 김관식'을 명함에 박아 돌리며 한 표를 호소했다. 아홉 명의 출마자 중에 7등을 했으니 돈 없는 대한민국 시인의 체면은 살린 셈이다. 역사적인 '장면군'과의 대결은 패배로 끝났지만 요즘 같으면 대통령선거에 뛰어든 셈이니 그 패기와 오만은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낼 일이요, 우리 같은 졸개들에게는 은근히 어깨가 으쓱하는 화젯거리이기도 했다.

"근배야, 서정주 추천을 받거라. 서정주가 제일이다."돌체로 나를 찾아와 일러준 말이다. 말술을 사양치 않는 호주가였고, 사람들은 기고만장하는 품만 기억하지만 내게 있어 김관식은 자상하게 손을 잡아주는 배울 것 많은 시인이었다.

이근배(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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