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목재 한 켠에서 33년을 하다 6개월 전에 이 자리로 옮겼어요. 20년 전만 해도 잘 됐죠. 먹을 게 없었을 때니까. 요즘은 추수하느라 한창 바쁠 때라 사람이 덜해요. 근근이 먹고 살죠 뭐.”
‘쉭쉭’소리와 함께 가스불이 연신 무쇠를 달궜다. 옥수수 한 되를 넣고 10여 분 동안 돌던 무쇠 기계를 멈춘 후 가스불을 빼냈다. 뻥튀기 아저씨 김영선(63)씨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기다란 철망자루 대신 직접 제작한 나무 상자에 장구통처럼 생긴 기계의 주둥이를 살짝 들이밀고 긴 꼬챙이로 걸쇠를 젖힌다. ‘뻥!’ 하얗게 솟구쳐 오르는 연기와 함께 구수한 냄새가 진동한다. 나무상자 문을 열고 잘 튀겨진 강냉이를 빗자루로 쓸어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고 묶는다.
김씨는 아산 온천 1동 농약사 골목에서 33년 동안 뻥튀기 일을 해 온 일명 ‘뻥튀기 아저씨’다. 크라운 제과에서 초창기에 밀쌀로 ‘죠리퐁’ 만드는 일을 하다가 아저씨뻘 되는 친척의 소개로 아산에 와서 자리 잡은 게 시작이었다. 동일목재 한 켠에 터를 잡고 이제껏 쭉 한 자리를 지키다가 올 해 건물이 지어지면서 6개월 전에 가게를 옮겼다. 소리 때문에 가게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오랜 단골들이 용케 가게를 다시 찾아와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 최고의 간식이었던 뻥튀기. 김씨는 쉴 틈 없이 기계를 돌리며 뻥, 뻥 소리를 내던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두 배 세 배로 튀겨진 것은 비단 뻥튀기만이 아니었다. 뻥튀기 장사로 1남 2녀를 키워내고 시집, 장가를 보냈으니 말이다. 한 대로 시작했던 기계가 넉 대로 늘어났지만 요즘엔 간신히 두 대만 돌리고 있다. 예전에는 손으로 일일이 기계를 돌려야 했는데 요즘엔 그나마 자동이라 수월하다. 그렇지만 석유값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한 되 튀기는데 3000원이에요. 기계 두 대만 하루 종일 돌려도 벌이가 괜찮죠. 근데 손님이 없어도 무쇠는 계속 달궈야 하니까 밤에 문 닫을 때까지 가스불을 켜 놔야 돼요. 석유 값이 만만치 않아요.”
매일 불(火)과 씨름하는 일이라 위험할 때도 많다. 수시로 뜨겁게 달궈진 기계를 만져야 해서 목장갑은 두 겹으로 끼고 일을 하는데 하루에 한 켤레씩 버리게 된다. 달궈진 기계에 데이는 일은 부지기수고 압력이 잘못돼 스스로 터질 때면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 만큼 위험할 때도 있다.
추수를 마치고 한가해지는 농가의 겨울 간식으로 뻥튀기만한 게 있을까. 사계절 길을 오가다 가계 앞 노점에 튀겨 놓은 강냉이를 보고 사가는 손님도 많지만 그래도 뻥튀기 가게는 겨울과 봄이 성수기라고 한다. 여름에는 물 끓이는 데 넣으려고 강냉이와 보리를 볶아가는 손님이 대부분이다.
“밥만 못하고 다 해요. 튀길 수 있는 곡식은 다 되니까요. 요즘엔 몸에 좋은 차를 만든다고 특이한 것들도 많이 가져 옵니다. 연잎, 둥글레, 연근, 돼지감자도 차 끓여 드신다고 볶아 가요.”
음봉에서 고추 빻으러 나왔다가 들렀다는 김정자(73)씨는 올해 거둬들인 옥수수를 담은 봉지를 주섬주섬 꺼내 깡통에 쏟아 부었다. “여기 다닌 지 오래됐지. 이 아저씨가 제일 잘 튀겨. 맛있게 잘 나와.”
케첩통이었던 깡통에 가득 부으면 한 되(2㎏)가 된다. 가져 온 곡식이 한 되가 채 안 되면 다음에 오겠다며 다시 되돌아가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종종 한 되 넘게 수북이 올리는 손님들과 악의없는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모두 20~30년이 넘은 단골들이다.
“옛날에는 없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괄시도 많이 당했지요. 하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하는 데까지 계속 해야지요. 다른 일은 생각해 본적도 없어요.”
장갑을 고쳐 끼고 걸쇠를 만지작거리는 김씨의 손이 다시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귀 막으세요, 뻥이요!”
글·사진=홍정선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