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박근혜는 지난 5년 뭐 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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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박근혜 현상은 엄연한 현실이다…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정치권 내에서도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고 있다”로 시작하는 책이 있다. 이태 전에 나온 『박근혜현상』이다. 진보 논객들의 진단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은 그랬나 싶다. ‘현상’의 주인공은 다른 이다. 그사이 무엇이 달라진 걸까.

과거 그가 정치인으로 뚜렷했던 장면이 스친다. 2007년 8월 20일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그는 2452표 차로 패배했다. “경선 무효”란 외침 속에서 그는 “경선 과정의 모든 일을 이젠 잊어버리자. 하루아침에 잊을 수 없다면 며칠, 몇 날이 걸려서라도 잊자. 다시 열정으로 채워진 마음으로 돌아와서 그 열정을 정권교체에 쏟아달라”고 외쳤다. 그가 진정 승복했는지는 논외로 하자. 분명 그 순간 경선 불복이란 구습의 사슬이 끊어졌다. 적어도 대선 주자급에선 말이다.

 2010년 6월 29일 국회 본회의장 발언대에 그가 섰다.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찬반토론에 나선 ‘그저’ 12명 의원 중 한 명으로다. 대통령급 지도자가 본회의에서 법률을 놓고 다른 의원들과 토론한다? 1980년대 이후 국회에선 좀처럼 볼 수 없던 일이었다. 2004년엔 DJ를 찾아가 “아버지 시절에 많은 피해를 보고 고생한 것에 대해 딸로서 사과한다”고 했다. 그 무렵 “우리가 소중히 기려야 할 장소는 4·19 묘지와 5·18 묘지”란 말도 했다. 그해 초엔 천막당사 시대를 이끌었다. 2001년부턴 당권·대권 분리를 외쳤다.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이 ‘일개’ 당원이 되고 사실상 총재 직함이 사라진 계기였다.

 박 후보가 한때 보수 성향의 개혁가로, 영·호남 화해의 적임자로 불린 이유일 게다. ‘박근혜 현상’의 토양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과거사·정수장학회 논란을 거치면서 그는 국민 다수와 동떨어진 역사 의식을 가진, 소수의 비서에게만 의존하는 불통의 권위적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다. 짧게는 몇 달, 길게 봐도 한두 해 사이의 이미지 변화다.

 사실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그의 발언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정수장학회를 두곤 과거에도 “자진 헌납이 된 것이고 좋은 일에 쓰도록 된 것”(2004년 8월)이라고 했다. 그 무렵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김지태 유족에게) 돌려주려고 백방으로 모색해 보았는데 합법적인 방법이 없었다. 여론 환기도 안 되더라”고 토로할 정도로 국민은 박 후보가 뭐라고 하건 개의치 않았다.

 이젠 박 후보가 뭇매를 맞고 있다. 근본적으론 박 후보의 위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야당 지도자에겐 무방하지만 대통령, 아니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에게조차 불허되는 일이 있는 거다. 권력이 커진 만큼 국민적 경계감도 커진 거다. 오해일지언정 말이다.

 박 후보는 그러나 그에 걸맞게 업그레이드되지 못한 듯하다. 5년 넘는 준비기간을 가졌는데도 역사 인식도, 주변 사람도, 권력 운용 방식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간 뭐 했을까 궁금해질 정도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여전히 ‘아버지’로만 인식하는 게 그렇다. 국민이 아파하는 대목에서 분노해야 하는데 아버지 문제에서 분노한다. 역대 대통령이 누군가의 남편, 아버지로 퇴행할 때마다 국민의 조롱을 받았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강점이었던 애국심은 희미해지고 효심만 두드러졌다. 주변은 주변대로 소외감에 떨었다. 충성도 높던 이들이 모래알이 됐다. 또 흠 정도였던 게 치명적 약점으로 증폭됐다. “소통이 어렵다”던 게 불통 또는 비선(秘線) 정치로 비판받는 식 말이다. 한때 “잘못 보좌한다”고 그의 주변을 욕하던 이들도 이젠 그를 공격한다.

 그가 노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은 오해도 많이 받고…남들은 권력자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무척 외로운 자리”라며 해준 말이 있다. “국민을 이길 수 있는 정치인이나 대통령이란 없다”는 거다. 그 또한 되새길 얘기다. 당나라 위징의 조언도 유효하겠다. “겸허하게 들으면 총명해지지만 편협한 말만 들으면 우둔해지는 법이다.”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70년대가 아닌, 2012년의 국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