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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도 회사일도 힘든 건 매한가지 육아는 의무 아닌 권리다 아빠들이여, 당당하게 요구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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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회의가 끝나갈 무렵 휴대전화가 울렸다. 연애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 모양으로 휴대전화를 쥐고는 쏜살같이 뛰쳐나가더니 한참 지난 후에야 들어온 휴대전화 주인. 예순 살 넘은 남자답지 않게 쑥스러운 표정으로 하는 말. ‘딸내미 전화라서’다. 딸을 뭔 상전 대하듯 하느냐는 사람들 말에 그가 사연을 털어놓았다. ‘자식들이 엄마하고 더 가까워 시샘이 난다’는 아빠들 불평을 이해 못했었는데 이제야 알겠노라 하면서, 딸하고 오붓하게 식사 좀 하려면 부인이 같이 나오고 부인과의 약속에도 딸이 나오는 걸 보면 둘이 마치 한 몸인 것 같아 샘이 나기도, 부럽기도 하단다.

 ‘평소에 잘 하셔야죠.’ 한마디 던졌더니 억울했던지 줄줄이 늘어놓는 하소연. ‘내 나이 남자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가족,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을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노라고.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고 시간외수당 일도 가리지 않았고. 엄마가 같이 놀아줄 때, 난 밖에 나가 돈 벌어와서 예쁜 옷 사 입히고 만난 것 먹였건만. 섭섭하단다. 이제 여유가 생겨 같이 놀고는 싶은데 서먹서먹하기만 하고.’

 그렇기도 하겠다. 엄마들이 애 낳고 키우는 동안 아빠들은 돈 벌어왔다. 아가의 뽀송뽀송한 엉덩이를 위해 기저귀 값을 벌었고 아가의 통통한 볼살을 만들기 위해 밤에도 수당 받으며 일을 했다. 대학 진학으로 정신 없을 때 엄마는 떡볶이 간식을 만들었지만 아빠는 떡볶이 살 돈을 만들었다.

 언젠가 갓 부화한 병아리를 키운 적이 있다. 조그만 그 병아리 새끼는 내가 가는 곳마다 졸졸 쫓아다녔다. 등 뒤에 있는 걸 몰라서 밟아 죽일 뻔도 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태어나서 처음 눈 마주친 동물이 부모인 줄 안단다. 그 병아리도 내가 제 엄마인 줄 알았던 게다.

 TV의 무슨 보험광고던가. 다급할 때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엄마’를 찾던데. 아빠는 돈으로, 엄마는 몸으로 정성껏 키웠건만 다들 엄마만 찾는다. 나 또한 육아도 해봤고 돈도 벌어봤지만 힘든 건 매한가지던데 아빠들은 참 억울하겠다.

 아빠들이여, 기회는 왔다. ‘나도 아가 키우고 싶다’고 요구하라. 축축한 기저귀를 갈아주면 뽀송뽀송한 엉덩이를 흔들며 웃는 표정이나 배고플 때 우유병을 물려주면 빤히 쳐다보는 맑은 눈동자. 이런 경험은 부모의 특권이다.

 18일자 중앙일보에 ‘육아휴직 아빠 3000명’이란 기사가 있었다. 남성 육아휴직의 걸림돌은 ‘기업들의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당장은 회사에서 불이익도 당하고 낮은 휴직급여도 문제겠지만 앞으로는 ‘교수 안식년제도’같이 남성 육아휴직도 법으로 의무화하자.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육아의 행복한 경험. 우리는 앞으로 그것을, 해야 할 의무라 말하지 말고 ‘아빠들이 당당히 누릴 권리’라 말하자.

글=엄을순 객원칼럼니스트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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