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미사일 사태의 비밀 공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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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호 33면

‘전 세계가 핵전쟁에 가장 근접했던 몇 주’. 1962년 10월 16~28일의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평가다. 벌써 50년 전이다. 위기 사태는 그해 10월 14일 미국 U-2 고공첩보기의 쿠바 정찰에서 비롯했다. 15일 미 중앙정보국(CIA) 사진분석국은 928장의 사진을 확인하다 은밀하게 건설 중이던 소련 미사일 기지와 중거리 핵미사일을 발견했다. 국무부를 거쳐 이를 통보받은 맥조지 번디 국가안보보좌관은 이튿날인 16일 아침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조지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전날 자정 무렵 통지받았다. 역사는 케네디가 이를 알게 된 16일을 사태 첫날로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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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세의 젊은 대통령 케네디는 단호했다. “소련이 쿠바 기지를 완공하면 선전포고로 간주해 제3차 세계대전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7년, 6·25 전쟁 휴전 9년 만에 벌어진 미·소 대결 앞에 세계는 화들짝 놀랐다. 핵전쟁이 나면 양국에서 1억 명씩 목숨을 잃을 것이란 추산도 나왔다. 공포는 쌍방 모두를 휩쓸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양국 모두 방공호 파기와 공습대피훈련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사태는 핵미사일을 싣고 쿠바로 향하던 화물선들이 뱃머리를 돌리면서 끝났다. 냉전 탓인지 케네디가 물러서지 않고 배짱 좋게 나오자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가 겁먹고 꼬리 내린 것으로 선전됐다. 이는 공산진영에는 강하게 나가야 이길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수십 년 동안 활용됐다.

하지만 사태는 비밀협상으로 마무리됐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다. 소련은 쿠바 미사일을 철수하고 미국은 터키·이탈리아에 배치했던 핵무기를 빼기로 했다. 미국은 소련에 쿠바 불가침 약속도 했다. 긴급상황에서 수뇌부끼리 대화할 수 있는 핵 핫라인 설치에도 합의했다.

나중에야 밝혀진 사실은 그것 말고도 많다. 당시 쿠바에는 100개나 되는 소련 중거리 핵미사일이 배치돼 있었다는 사실도 그중 하나다. 소련이 그해 11월 이 전술 핵무기들을 비밀리에 회수해간 과정이 최근 미 비밀문서 해제로 밝혀졌다.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염려한 흐루쇼프가 철수를 지시했다. 우발적인 핵전쟁을 진정으로 염려했던 것이다.

이 사태로 사람들은 핵전쟁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했다. 당시의 공포는 대중문화적 상상력으로 진화했다. 핵으로 인류가 멸망한 상황을 그린 수많은 영화와 비디오 게임이 그 산물이다. 이처럼 핵전쟁 위험 앞에 대부분은 공포에 질리지만 일부는 그 와중에 이익을 챙기는 것이 현실이다.

좋은 영화 소재가 될 만한 비밀도 하나 드러났다. 당시 카리브해의 소련 잠수함이 핵 어뢰 발사 직전 상황까지 갔다는 사연이다. 발사 승인권을 가진 장교 한 명이 거부권을 행사해 핵전쟁을 막았다는 사연은 그야말로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당시 알려졌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이렇게 비밀은 언젠가는 폭로되게 마련이지만 중요한 건 공개 시기다. 시간은 비밀 폭로의 위력을 퇴색시킨다. 이달로 발발 50주년을 맞는 쿠바 핵 위기가 주는 교훈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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