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교양] '대학(大學)-진보의 동아시아적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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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大學)-진보의 동아시아적 의미/김기현 지음, 사계절, 9천8백원

"고전을 폄하했던 태도 만큼이나 고전을 숭배하려는 태도 역시 단절의 골을 깊게 해온 측면이 있다. 진리의 이름으로 고전을 신비화하는 관점을 지양하고, 현대 독자들이 과거와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서구 번역서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이례적인 성격의 시리즈물이 이 출판사의 '오늘 고전을 읽는다'이다. 앞의 선언을 앞세운 이 시리즈의 둘째 권 '대학'은 오늘의 관점에서 전시대의 사서삼경(四書三經)인 '대학'을 음미하고 있다.

때문에 이 책은 기본적으로 입문서의 성격이면서 한 소장 연구자가 '대학'이라는 텍스트를 바라보는 해석의 시선이 살아 있고, 그 때문에 매력 있는 읽을거리로 다가온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한문 1천7백53자, 즉 요즘의 A4용지 한 장 분량에 불과한 '대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전시대의 엘리트들의 필독서로, 그걸 넘어 동아시아의 제왕학으로 떠올랐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는 '대학'을 무엇보다 '유학의 실천강령'쪽으로 규정한다. 이런 입장은 이 책을 재편집했던 주자의 입장과 또 다른 입장이다.

송나라의 주자는 이른바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궁리(窮理)를 강조하면서 이 책을 지식의 문제, 형이상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본래 '예기'의 한 장(章)에 불과하던 '대학'은 주자의 이런 재해석 작업에 힘입어 경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학'이 실제로 읽혔던 사회적 맥락은 유교의 정치이념를 구현하기 위한 핵심 교과서의 측면이었다. 수신(修身)에서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실천강령을 이 책만큼 요약정리한 텍스트는 드물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따라서 저자는 " '대학'은 한 편의 정치논문"이라는 현대 중국대륙 쪽의 한 학설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문제는 이 대목부터. 이 책이 교양서를 넘어 새해 벽두 음미해볼 만한 논쟁적 주제에 발을 뻗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즉 저자는 '대학'의 정치이념을 옹호하면서 서구의 근대문명 비판의 태도를 선명하게 유지한다. 이런 태도는 서양 근대문명의 '바깥으로 치닫는' 외향적 진보 이념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는 점이다.

"미국 중심의 평천하(平天下)질서"인 현재의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반격도 이뤄진다. 전시대 동아시아 문명, 사대부를 중심으로 전개됐던 조선시대의 지식인 사회질서에 대한 옹호와 동전의 앞뒤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주목거리다.

"'대학'은 조선조 역사에서 선비 문화의 전통에 확고하게 기여한 고전이다. 조선의 지식인 문화가 낳은 선비정신이란 '대학'이 추구하는 대학인의 정신 외에 다름 아니다."(2백11쪽) 따라서 저자는 성리학이 경직화되는 결과 등장한 19세기 세도정치 이전 사대부들 사이의 붕당정치의 순기능에 대해서도 높은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다.

'대학'을 중심으로 한 사서(四書)의 가치와 세계관이 주도했던 16세기 후반 이후의 선비문화는 "한국의 문화가 낳은 독특한 노블레스 오블리주"(2백34쪽)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것이 현대 한국의 혼란상 보다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평가도 내리고 있다. 어쨌거나 이런 문제 제기는 적지않은 대목에서 때로는 치밀하지 않고 논리의 비약 역시 없지 않다. 그러나 독자적인 고전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별도의 저작물에서 후속작업을 해볼 만하겠다는 판단도 든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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