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 덕에 바빠졌지만, 나를 키운 건 8할이 비틀스와 조용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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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평론가 임진모씨는 “K팝으로 상징되는 한국 가요계가 질적·양적으로 성장하면서 이를 평가하는 평론가들의 책임도 더욱 커졌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소심한 중학생은 멀미가 심해 밖에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에겐 자신의 방이 놀이터였다. 이소룡의 큰 팬이었던 그는 방안에서 이소룡 흉내를 내고, 라디오에 귀 기울이며 청춘을 보냈다. 이성을 잃게 하는 음악의 힘에 이끌려 중3 때 음악평론가가 되겠다 마음 먹었다.

 국내 대표 음악평론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임진모(53)씨 얘기다. 1990년대 초반 전문 음악평론의 길을 연 그는 신문·잡지·방송·강단을 넘나들며 자신의 이름 석자를 브랜드로 만들었다. 신간 『가수를 말하다』 (빅하우스)를 낸 그를 16일 만났다.

 ◆연예인 뺨치는 스케줄=임씨는 고려대(사회학과) 졸업 뒤 팝송 기사를 쓰고 싶어 약 7년간 신문기자로 일하다 91년부터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요즘 임씨는 매주 라디오 프로그램(게스트 고정 출연) 11개와 방송 프로그램 1개(Mnet ‘볼륨텐’ 공동 진행)에 출연한다. 또 한 달에 강의 10~20건, 기고 평균 10건 정도를 소화한다. 강의는 대전·부산·제주 등 전국이 무대다. 한류 붐을 타고 그의 스케줄이 바빠지는 바람에 3년 전부턴 매니저도 뒀다. 스타급 연예인 부럽지 않은 요즘이다.

 - 평론가 생활 중 가장 바빴던 때는.

 “먼저 1995년 서태지와아이들이 ‘컴백홈’을 들고 나왔을 때다. 그 전해에 발표한 ‘교실이데아’란 곡이 거꾸로 들으면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등 각종 논란이 생기면서 서태지와아이들이 사회 이슈가 됐다. 두 번째는 2009년 마이클 잭슨이 타계했을 때다. 가장 바빴던 건 바로 요즘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빌보드 2위를 2주째 한 날, 언론사 전화가 50통 왔다. 너무 바빠서 내가 싸이가 된 줄 알았다. 하하.”

 그는 “ 나를 키운 건 8할이 비틀스·서태지·조용필·마이클 잭슨”라고 했다.

 ◆위대한 음악의 힘=『가수를 말하다』의 부제는 ‘영혼으로 노래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가수 41’이다. 이미자·신중현·남진·나훈아부터 서태지·크라잉넛까지 41팀의 인생·음악 철학을 소개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13년째 음악 웹진 ‘이즘’을 운영하면서 많은 가수들을 직접 인터뷰해왔다. 새 책은 인터뷰와 리뷰를 넘나들며 대한민국 가요사를 새롭게 썼다. 노래는 넘쳐나지만 정작 이에 대한 정리와 평가가 부족한 우리 가요계의 ‘빈 구석’을 채워준 셈이다.

 - 2004년 『우리 대중음악의 큰 별들』 이후 8년 만의 책이다.

 “음악평론가가 책으로 기록을 남기지 않는 건 직무 유기다. 싸이를 계기로 K팝의 현주소를 주목하게 된다. K팝은 느닷없이 융기한 게 아니다. 선배들의 활동이 오랫동안 퇴적돼 나타난 거다. 그래서 K팝의 역사와 현황을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 음악평론가의 조건이라면.

 “나쁘게 들릴 줄 모르지만 이중인격이어야 한다. 노래를 접할 땐 감성적, 글로 정리할 땐 이성적이어야 한다. 순수하게 노래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잔혹하게 비판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음악을 글로 쓰는 일”이라고 했다.

 “단순히 글로 쓰자면 좋은 음악이 모두 ‘아름다운 멜로디’로 똑같지 않나. 그래서 미국에선 음악평론가를 높게 평가한다. 평론의 문체만 보고 음악이 연상되어야 한다. 나도 그러자면 한참 멀었다.”

 - 20년 전과 요즘 가요계를 비교하자면.

 “예술을 버린 대신 산업을 얻었다. 감동지수는 확실히 낮아진 것 같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한류와 K팝이란 타이틀 아래 우리 음악이 바깥에서 선전하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고 있다.”

 어떤 이는 그를 ‘스타 평론가’라 부르지만, 그는 “영원한 ‘현역 평론가’로 불리고 싶다”고 했다.

 “10년 뒤인 60대 중반에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그만한 영광이 어디 있을까요. 음악 글 쓰다 죽는 게 꿈입니다.”

가수 7인에 대한 임진모씨의 한마디

▶ 패티김

- 대중 가요 고급화의 주역이다. 무기교 자연창법으로, 대중 가요 부르기의 기본은 기교가 아닌 순수에 있음을 증명한 ‘스탠더드 팝의 여황(女皇)’이다. ‘여왕’으로는 부족하다.

▶ 이미자

- 대중음악의 가장 큰 역할이 대중을 위로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이미자의 노래만큼 그 역할에 충실한 음악은 없을 것이다. 이것 하나만으로 이미자는 한국의 최고 가수다.

▶ 신중현

- 유행 따르기에 급급하고 록은 여전히 변방에 머물고 있는 이 땅에 신중현과 같은 아티스트가 있었다는 것은 축복이다. 1960·70년대 국내 대중음악의 설계자다.

▶ 나훈아

- 많은 이가 고향을 버리고 도시 로 몰려가던 당시 나훈아는 이농(離農)의 아픔을 대변했다. 그의 노래는 곧 우리 국민들의 정서였다. 기성세대에게도, 젊은층에게도 전설적 존재가 됐다.

▶ 조용필

- 조용필과 결부해야 할 키워드는 넘버원과 같은 말이 아니라 그런 위상을 가져온 자기 혁신의 자세다. 90년 대중음악 역사상 1이라는 숫자는 조용필을 위해 남겨 둬야 할 영구결번이다.

▶ 김광석

- 김광석의 노래는 듣는 게 아니다. 흡수되는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는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진실한 독백이다. 그가 없었다면 90년대 포크는 사망선고를 받았을 것이다.

▶ 이소라

- 그의 노래는 겉으로는 태연하나 속으로는 눈물을 달고 사는, 흔들리는 여성들의 일기장이다. 그들의 불안한 갈망, 야위고도 앙상한 내심은 이소라를 만나 비로소 안식처를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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