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양보할 수 없는 가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9면

문창극
대기자

비슷한 물건을 내놓고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그것처럼 곤혹스러운 일이 없다. 이번 선거에서 후보들이 내놓은 정책들이 바로 그렇다. 경제만 하더라도 세 후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경제 민주화를 하겠다고 하고 재벌들을 손봐야 한다는 합창 외에 별다른 점이 없다. 북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세 사람은 한결같이 북한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기타 정치·사회 이슈도 차이점이 거의 안 보인다. 이렇게 구별이 안 된다면 반드시 누구여야 한다는 것이 의미 있을까? 그런데 왜 이렇게 정책에서 차이가 나지 않을까? 아마도 세상을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보는 눈이 달라야 정책 처방이 달라질 텐데 지금 후보들은 너나없이 같은 눈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보수는 보수다운 눈을, 진보는 진보다운 눈을 가져야 한다. 복지가 시대적인 과제가 됐다 할지라도 보수와 진보는 분명히 차별된 정책을 보여야 한다.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보수가 자유와 경쟁에 비중을 둔다면 진보는 평등과 분배를 강조한다. 진보가 세금을 더 걷어 복지를 늘리자고 한다면 보수는 일자리를 더 만드는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진보가 부자의 몫을 떼어 가난한 사람에게 주자고 한다면 보수는 스스로 자립하는 중산층을 기르는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진보가 재벌 때리기에 목청을 돋우면 보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발전하는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보수정당에서 부유세를 걷자고 하고 재벌을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크다. 경제 문제에서 이 나라의 보수는 사라졌다.

북한 문제도 그렇다. 진보가 평화 우선을 주장한다면 보수는 당연히 자유 지키기를 강조해야 한다. 오늘의 남북 긴장은 남쪽 정부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핵은 누가 만들었으며 금강산·천안함·연평도 사건은 누가 저지른 일인가. 원인은 북한에 있는데도 진보진영에서는 오히려 우리를 냉전세력·전쟁세력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북한의 주장과 사실상 다르지 않다. 그들이 저지른 일을 덮어두고 무조건 평화를 외친다고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다. 당연히 이 문제에 대해서도 후보 간에 확실하게 입장 차이가 나야 한다. 한쪽이 무조건 대화를 주장하면 다른 쪽은 북한의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하고, 핵은 안 된다고 일관성 있게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후보들의 입에서는 북한과 잘 지내자는 얘기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북한 문제에서도 보수는 존재가 없어졌다.

 독일은 통일 전까지 지금의 우리와 비슷한 갈등을 겪었다. 독일의 좌파 정당인 사민당 인사들은 평화를 주장하며 동독과 정치회담에 열을 올렸다. 일부 서독 국민들도 그들의 평화정책을 지지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통일 후 밝혀진 동독 기밀문서는 사민당과 동독 공산당이 평화회담을 한다면서 사실은 기민당 정부와 미국을 비판하고, 선거에서 사민당을 도울 방법을 논의하는 데 열을 올렸다고 보여준다. 독일 통일을 이룬 헬무트 콜 총리는 자서전에서 사민당은 서독 정부보다 오히려 호네커 동독 공산당 정부와 더 마음을 같이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서독이 통일을 주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보수당인 기민당의 한결같은 통일노선 때문이었다. 서독의 자유정신과 동독 주민의 인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며 이것이 독일 통일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지금 후보 간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나타난 현실에만 관심이 있을 뿐 보이지 않는 가치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가치보다는 시시로 변하는 여론을 모든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더 중요하고 근원적인 가치들이 이끌어 왔다. 그 근원적 가치가 인간 역사를 만들어온 것이다. 북한 문제만 해도 대결하는 현상만 볼 뿐 무엇을 위해 대결을 하고 있는지 잊어 가고 있다. 독일에서도 진보주의자들은 자유를 말하면 냉전주의자·전쟁광으로 몰아갔다. 그게 무서워 말하지 않으면 가치를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가치가 무시되니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NLL을 포기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라의 기초가 붕괴될 만한 사건이다. 그때는 다행히 정권 말이어서 사실이라 해도 그 구상을 실현시킬 시간이 없었다. 아무리 평화와 협력을 말해도 우리의 자유를 지키고 확산시키지 못한다면 헛소리다. 그것은 억압과 독재를 용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사람이라면 자유라는 가치는 양보할 수 없는 것임을 천명해야 한다. 복지는 그 다음의 가치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우리는 자유를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에게 표를 던져야 한다. 나라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