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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기업 울리는 ‘남방 한계선’ 대졸자, 양재·기흥라인 아래론 안 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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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호 01면

11일 오전 7시, 서울 한남대교를 지나 경부고속도로를 타는 길목.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에서 들어오는 차들로 고속도로 초입부터 정체현상이 심했다. 반포·서초 인터체인지에서 나 홀로 승용차와 대기업 통근버스가 몰려들었다. 오른쪽에 LG전자의 서초 연구개발(R&D) 캠퍼스, 왼쪽에 현대차 본사가 있는 양재 인터체인지에서 나 홀로 승용차들이 고속도로를 잇따라 빠져나갔다. 한참 달리다 보니 삼성전자 사업장이 위치한 기흥 인터체인지에선 수많은 통근버스들이 고속도로를 벗어났다.

이날 기자와 함께 차를 타고 서울 서초동 지사에서 대전 대덕 본사로 가던 김성진 아이카이스트 대표의 얘기다. “매일 아침 출퇴근 시간대 경부고속도로에선 서울 거주자들의 직장 위치가 드러난다. 넥타이 부대인 사무직원들은 양재동까지, 캐주얼 차림의 기술직원들은 기흥까지 많이 볼 수 있다. 젊은 사무직원들은 유망 벤처기업들이 입주한 판교까지 눈에 띈다.”

글로벌 불황 때문에 올해 취업시장도 꽁꽁 얼어붙을 조짐이다. 소위 ‘SKY(서울·고려·연세대)’ 졸업자들도 대기업 입사가 하늘의 별 따기 같다. 그런데 지방에선 구인난이 심각하다. 중소기업은 물론 내로라하는 대기업도 그렇다. 지방 현장 인력을 못 뽑거나 신입 직원이 지방 근무 발령을 받으면 퇴직하는 사례가 다반사다. 취업 준비생이나 젊은 이직자들이 ‘근무지=서울’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요즘 대기업 인사담당자 사이에선 ‘양재라인’ ‘기흥라인’이란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양재와 기흥은 우수 인력들이 근무지의 최후 보루로 따지는 ‘남방 한계선’이나 마찬가지다. 사무·연구직 사원들은 현대차 본사가 있는 양재동까지, 기술·생산직 사원들은 삼성전자 사업장이 위치한 기흥까지가 마지노선이다. 지방 대기업에서 일하는 어느 임원의 한탄이다. “이공계 졸업자를 대상으로 취업 설명회를 할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게 근무지가 지방이라는 사실이다. 취업 준비생들이 회사 비전과 급여에 만족하다가도 지방 근무 얘기만 나오면 펄쩍 뛴다. 뒷말을 들으면 애인이나 가족이 결사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분위기는 대학입시에서도 반영된다. 지난 8월 서울대는 2013년도 수시모집 결과를 발표했다. 전체 경쟁률은 8.07대 1로 사상 최고였다. 그런데 조선해양공학과의 지역균형발전선발은 0.83대 1로 사상 처음 미달 사태를 기록했다. 서울대 입시 관계자는 “‘조선해양공학과=지방 근무’라는 인식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서울에 직장이 보장되는 학과의 인기는 상한가다. 지난해 처음 신입생을 뽑은 고려대 사이버국방학과는 2년 연속 우수 인재들이 몰렸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장은 “병역의무 특혜에다 취업 보장, 서울 근무라는 3박자가 매력적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이버 보안을 전공하는 이 학과의 졸업생들은 서울 용산의 ‘사이버 사령부대’에서 7년간 군 복무를 하면서 석·박사 과정을 이수할 수 있다. 이후 금융회사 등 서울에 본사를 둔 민간기업을 골라취업할 수 있다.

취업전선에서 ‘인(in)-서울’ 집중 현상이 심화되자 조선·화학·철강 등 수출 효자 업종의 국가 경쟁력도 위협받는 실정이다. 이공계 기피, 지방 근무 외면의 2중고 때문이다. 울산·경남 거제, 전남 여수·광양, 충남 서산·당진에 자리 잡은 조선·유화·철강단지에선 대기업조차 사람을 못 뽑아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러자 거제의 조선업계는 지난달까지 진행한 대학가 취업설명회에서 서울보다는 부산·경남 지역에 집중했다. 서울의 주요 대학 졸업예정자에게 바닷가 옆 조선소는 관심 밖이어서다. 조선업계는 또 ‘조선소 옆에 연구인력을 배치한다’는 관행을 깨고 울며 겨자 먹기로 서울 지역에 종합연구소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2만여 평 규모의 R&D센터를 마련하면서 주력 연구시설인 거제 옥포연구소엔 최소 인력만 남길 계획이다. 삼성중공업도 거제조선소의 연구 기능을 줄이고, 판교에 종합R&D센터를 구축할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조선해양의 유인상 전무는 “1990년대 일본에서 조선산업이 우수 인재의 기피 대상이 돼 한국에 세계 1위 자리를 넘겨줘야 했다”며 “우리가 요즘 그런 꼴이라 중국에 1위 자리를 뺏기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우수 인력의 지방 기피 현상은 한국판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대전 대덕연구단지도 예외가 아니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정부출연 연구기관 인력 미(未)충원율’에 따르면 이 지역 연구기관들은 2009년부터 지난달 20일까지 모집정원의 10%를 못 채웠다. 지난해의 경우 항공우주연구소는 43명 채용에 8명, 원자력연구소는 74명 모집에 6명이 각각 미달됐다.

올해 3000명 이상 졸업생을 배출한 대학 가운데 취업률 1위를 기록한 성균관대도 ‘인-서울’ 선호현상에는 고개를 떨군다. 엄한주 학생처장은 “대기업 인사담당자들이 지방 현장에 졸업생들을 유치하려고 난리지만, 학생들은 서울 근무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간혹 멋모르고 대기업의 지방 현장에 배치받은 졸업생들도 금세 사표를 던진다는 것이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대기업 신입사원 중 14%가 1년 안에 회사를 떠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젊은 인력이 지방 근무를 기피하는 이유는 뭘까. 관계자들은 교육·문화·커뮤니티의 3불(不)이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본인보다 연인·배우자·가족이 근무지에 더 민감하다는 것이다. 특히 자녀교육은 최우선순위다. 한 대기업 임원은 “지방 근무 때문에 애인이 결혼을 미루거나 결별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군대 갈 때보다 지방 근무 때 애인과 더 많이 헤어진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기혼 사원도 자녀들의 중·고교 입학을 앞두고 이직을 고민하거나 기러기 가족 생활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문화예술 공연의 부족도 불만이다. KAIST의 한 교직원은 “얼마 전 아내가 ‘서울 친구들은 서울시청 광장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 공연을 봤다는데 우리는 그럴 수 없어 열등감이 든다’고 하더라”고 털어놨다. 젊은 또래 직장인의 커뮤니티 부재도 거론된다. 지방 현장에 나이 든 직원들이 많아지면서 젊은 직원들은 물론 그 가족까지 이웃과 세대 차이를 느끼는 실정이다.

지방 근무의 성공사례는 없을까. 대덕연구단지에서 그런 움직임이 발견된다. KAIST 1호 벤처기업이자 대덕에 본사를 둔 아이카이스트는 우수 인재 유치를 위해 서울 서초동에도 사무실을 뒀다. 김성진 대표는 “서울 근무 직원도 대전 본사를 오가면서 대덕단지라면 살 만하다는 체험을 하고 아파트 제공 등 다양한 혜택을 목격하면서 이제는 상당수가 자발적으로 대전 근무를 희망한다”며 “연말께 서울 사무실을 폐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전시와 KAIST는 최근 ‘대덕 공동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송락경 KAIST 이노베이션센터 소장은 “염홍철 대전시장이 최우선 정책과제로 ‘KAIST 졸업생들이 대전에서 일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구상하라’고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KAIST 졸업생 실태조사를 해보니 취업자의 10%만이 대전 지역에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양측은 내년부터 KAIST 학생·교수를 대상으로 대전 지역에서 창업·취업, 그리고 공동사업을 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운영할 예정이다. 그나마 성공모델로 꼽히는 대덕단지조차 실리콘밸리 같은 선순환 지역 발전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대학·기업·지자체 3자가 공동 해법을 찾아야 하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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