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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키치 그리고 창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92호 18면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이 쏟아지지만 동시에 레트로(retro·복고)와 키치(kitsch·모방)도 유행이다. 복고가 과거를 재해석한 것이라면, 키치는 자신이 B급 아류임을 아예 공표해 버린다. 레트로나 키치는 대개 직접적으로 감상을 건드려서 때론 조야해 보이지만, 요즘엔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기도 한다. 그러나 아도르노 이전의 고전 미학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그 둘 다 아주 아름답거나 도덕적이지는 않다. 피카소도 과거의 명화들을 교묘히 모방했다고 공격받은 적이 있다. 잡스는 삼성이 카피캣(Copycat)이라 했지만 내 눈엔 애플 역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모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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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를 추억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이나 ‘건축학 개론’이 복고라면, 영화 ‘광해’는 ‘데이브’의 모방 같다. 싸이의 뮤비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 오래된 영화 ‘나인하프위크’ ‘펄프 픽션’의 키치다. 박근혜 후보의 패션에는 새마을 운동이, 안철수 후보의 북방열차에는 ‘은하철도 999’가, 문재인 후보의 비서실에는 386의 추억이 보인다. 소득이 두 배 이상 되는 선진국의 복지정책을 3당이 모두 따라 하겠다는 것도 일종의 키치적 현상이다. 오바마 역시 마틴 루서 킹, 케네디, 레이건, 클린턴의 혼성모방이다. 일본도 요즘 전쟁 직후의 미시마 유키오식 극우에 대한 복고적 환상에 빠지고 있는 것 같다.

진화론으로 사회현상을 해석하는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아이디어와 문화현상이 퍼지는 것을 밈(meme)이라 칭했다. 예컨대 아리랑이나 강남스타일 같은 중독성 노래뿐 아니라 의식주의 모든 산물은 모방되고 과거는 끊임없이 재현된다는 것이다. 집단 지성의 시대이므로 이런 현상은 더 증폭될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애니팡, 트위터의 유행도 집단적 모방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저작권이 자본을 선점한 선진국들의 배타성이 급조한 개념이란 의견도 있다. 과거 일본이나 한국이 모방의 천국이 아니었고, 현재 중국이 짝퉁왕국이 아니라도 돈을 벌 수 있을까. 문명이 시작하는 시점만 보면 미국은 서유럽의, 서유럽은 로마의, 로마는 그리스의, 그리스는 이집트의 복고적 아류였다. 그리스도의 이미지에는 이집트의 태양신, 헤르메스·아폴론 ·제우스가 섞여 있고, 마리아와 관세음보살의 이미지 역시 서로 겹친다. 공자님 말씀대로 온고이지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포스트모더니즘도 어떤 작가도 홀로 창작하는 것은 아니라 했다. 따라 하고 싶으면 누군가를 흠모한 헌정(오마주)이라 솔직하게 밝히면 된다. 오래된 옷을 레트로 패션이라고 필자는 수십 년 된 옷과 머플러를 자랑스럽게 입고 다닌다. 사람들이 촌스럽다며 뭐라 뭐라 해도 그만이다.

문제는 복고와 키치가 싸구려 감상과 억압으로 오염된 퇴행 현상을 보일 때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김일성은 스탈린의, 스탈린은 레닌의, 크메르루주는 아유슈비츠의 사악한 복제품이다. 특히 문명이 쇠락할 때는 키치적 독재와 감동 없는 상투성만 횡행한다. 아직 우리나라가 그럴 만큼 성숙하지 못한데, 키치와 레트로에 안주해 창조성이 사위어 버린다면 큰 비극이다. 문화건 정치건 진부함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독창적 미래를 준비해야 지구촌에서 생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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