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탈리아 미술 전통, 한국적인 자연미로 발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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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곳 중 하나인 강남역을 거니는 사람들에게는 쉴 곳이 필요하다. 바쁘게 도심을 오가는 와중에 몸도 마음도 어딘가에 잠시 기대고 싶다. 이들은 무심코 거대한 붉은 벽돌빛 건물 앞 화단에 앉는다. 한숨을 돌리고 뒤를 바라보니 화려한 색상의 원통형 기둥들이 하늘로 뻗어 있다. 이 기둥들이 세계적인 작가의 조형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강남대로와 사평로가 만나는 사거리 한쪽에는 지상 25층의 규모를 자랑하는 교보타워가 자리하고 있다. 육중하면서도 독특한 외관이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모은다. 이 건물 자체가 거대한 예술작품이기도 하지만, 건물 전면 왼쪽에 세워진 미술 작품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조각가로 활동하는 류근상(48) 작가의 ‘코리아 환타지 I·II’다.

  이 작품에는 중세의 성당 건물을 꽃처럼 물들이던 유리 모자이크 기법이 사용됐다. 적색·청색·백색의 142개 원통 기둥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양을 하고 있다. 선율에 따라 움직이는 형상을 몸소 표현한다. 그 자태만으로도 밝고 경쾌한 바람을 일으키는 듯하다. 높이 4m, 길이 8m인 이 유리조각은 붉은 벽돌로 된 쌍둥이 건물인 교보타워에 맞춰 좌우 대칭 형식을 따랐다.

  “코리아 환타지는 중세 이탈리아 미술의 전통을 한국적 자연미로 승화시켜 표현한 것이다.” 당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작품을 설치한 류씨의 얘기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평면 작품에만 사용하던 유리 모자이크 기법을 입체 설치 미술에 쓰는 실험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약 15년 동안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류 작가는 1980년대 후반에 이탈리아 평론 대상과 유럽미술대전 최우수 외국인 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실력파다. 피렌체 국립미술원에서 수학한 그는 비잔틴 모자이크 글라스라는 특수 유리 재료를 즐겨 사용한다. 비잔틴 모자이크 글라스로 빚어진 그의 작품들에는 만물의 약동하는 생명력이 빛과 색채의 결합으로 형상화된다.

  음악적인 요소들을 시각적으로 해석한 회화와 모자이크가 주를 이루는 그의 작품세계는 코리아 환타지에 그대로 반영됐다. 마치 음률이 생동하듯 뻗친 기둥들과 영롱한 색채가 이탈리아의 해변을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유리 원판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색유리 원판이 손톱만한 크기로 세공됐다. 약 150만개의 조각을 내고 여기에 각각 기하학적 도형과 문양을 붙인 것이다. 작품을 반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유리가 1500℃의 고온에서 가공되기도 했다.

  코리아 환타지가 교보타워를 빛내기까지는 또 다른 사연이 있었다. 교보타워가 처음 착공되던 2001년 당시 건축주가 건축가에게 미술 장식품을 직접 고르도록 선택권을 줘 화제가 됐었다.

  교보타워를 건축한 사람은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69)다. 1985년 베통 건축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스위스 통합은행 건물, 삼성미술관 리움 등을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대 건축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꼽힐 정도다. 그런 그의 대표적 작품 중 하나가 교보타워인 것이다.

  특히 교보타워의 경우 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마리오 보타의 설계안을 무려 17번이나 되돌려 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17번의 설계안이 재검토된 끝에 선정된 최종안이 지금의 건물이다.

  이후 미술장식품 선정 작업이 진행됐다. 100개의 작품 제안서 중 마리오 보타가 직접 고른 작품이 바로 코리아 환타지였다. 건축설계자가 실내·외 장식품을 일일이 선정하는 것은 건축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이처럼 교보타워는 마리오 보타의 예술성과, 류근상 작가의 조형미가 결합돼 강남의 명물로 자리하게 됐다. 고품격 사무실의 실용성을 갖춘 것만이 아닌, 건물 자체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게끔 만든 것이다. ‘고품격 공간 창조와 생명·삶의 존엄’을 상징한다는 빌딩의 테마는 지금도 강남 한복판을 빛내고 있다.

글=김록환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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