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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볕, 나무 그늘, 시원한 차, 그리고 책

중앙일보

입력

우리나라에서는 가을이 독서의 계절로 알려져 있지만, 외국에서는 오히려 여름을 독서의 계절로 여기는 분위기다. 출판사에서는 여름 시즌용 소설을 몇 달 전부터 예고하고 서점마다 고객들에게 휴가지에서 읽을 만한 책을 선정하느라 분주하다. 책 읽는 일을 휴식으로 여기지 않고 실용적인 정보 습득으로 여기는 우리에게는 독서도 일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런 사정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책을 읽는 일만큼 마음을 안정시키는 휴가가 없다. 배낭에 넣어 가면 휴가를 더욱 풍성하게 즐길 수 있는 책을 소개한다.

《바다의 선물》 앤 머로 린드버그 지음
넣자면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책이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은 '바다의 선물'이라는 제목만큼이나 넓고 광활하다. 1927년 대서양 단독 비행으로 유명한 찰스 린드버그의 부인답게 A.M. 린드버그 역시 비행기 조종사로 활동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헌신적인 구호 활동을 펼치며 활발한 사회 활동을 벌였다. 그런 린드버그 부부에게 1932년 생후 20개월이 된 맏아들이 유괴돼 그 아이를 잃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책은 그 사건을 겪고 난 뒤, 영국 이민을 거쳐 다시 미국 코네티컷 주에 정착하면서 쓰게 됐다.

이 책을 펼치면 바다에서 수없이 만나는 조개 하나를 통해 생명의 이치,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결국에는 우주적 존재에 대한 경건한 납득에까지 이르는 과정이 차분하게 펼쳐진다. 바닷가에 대해, 조개에 대해, 고둥에 대해 린드버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지만, 실은 그게 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특히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셈이다. 소박한 삶, 고독, 원심적인 삶이 아닌 구심적인 삶.

이 책에서 그녀는 "바닷가란 독서하거나 집필 혹은 사색할 장소는 아니다. 나는 지난 몇 해 동안의 경험에 비춰 마땅히 그것을 알고 있었어야 했다. 어떤 진실된 심적 단련이나 정신의 드높은 비상을 즐기기에는 해변은 너무 따뜻하고 축축하고 부드럽다"고 말했지만, 이 책을 읽을만한 가장 좋은 곳은 관광객이 드문 비수기의 바닷가가 아닐 수 없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리처드 보드 지음
하릴없이 빗질하듯 모래톱을 샅샅이 훑고 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비치코머(beachcomber)'가 되는 데 그렇게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간을 내어서 모래톱까지 가면 된다. 하지만 쳇바퀴 돌 듯 일상의 톱니바퀴에 휩쓸려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그 일은 얼마나 어려운지! 이 책을 쓴 리처드 보드 역시 원래부터 비치코머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광고회사 간부, 신문과 잡지의 편집자로 분주하게 살아가던 뉴요커였다. 그러니까 도시인들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혼한 뒤, 뉴욕을 떠나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의 미라바 해변 오막살이에 정착해 비치코머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가장 가깝게 지내는 아내의 마음마저 알지 못하던 그가 미라바 해변에서 배운 것은 무엇일까? "비치코밍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나는 두 가지가 다 좋다. 첫째는 수평선을 훑어보는 방법이다.(…) 또 한 가지는 머리를 푹 숙이고 햇빛을 받아 하얗게 바랜 모래밭 속에 묻힌 보배들을 찾으며 어슬렁어슬렁 걷는 방법이다." 바쁜 삶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지 못하는지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마법 골무가 가져온 여름 이야기》 엘리자베스 엔라이트 지음
"오랫동안 날씨는 내내 이 모양이었다. 매일 밤 가넷의 아버지는 저녁 식사 후에 밖으로 나와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옥수수 밭이나 귀리 밭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글렀어. 오늘밤에도 비가 안 올 거야.' 빨리 비가 오지 않으면 옥수수 농사도 다 망치고, 귀리는 베어서 건초로나 써야 할 판이었다." 1939년 미국에서 출간돼 뉴베리 메달 상을 받은 이 작은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가뭄이 심한 요즘 우리 처지와 비슷해 공감 가는 부분이 많다.

계속되는 가뭄, 찜통 더위, 멱감기, 추수품평회 등 이제는 아련한 향수로 남은 1930년대 힘들었던 미국 위스콘신 주의 시골 마을 생활을 그대로 전하는 책이다. 아직 미국 시골 마을이 공동체적으로 살아가던 시절의 이런저런 얘기들이 담담한 문체에 묘사된다. 더위에 멱 감으러 갔던 가넷이 발견한 마법 골무. 그 마법 골무가 과연 가넷의 여름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읽는 사람마다의 기억 속에 남은 어린 시절 여름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묘한 책이다. 그 옛날 어린 시절의 여름으로 휴가를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없는 일이라면, 이 책을 펼칠 일이다.

《프로방스에서의 1년》 피터 메일 지음
유럽인들에게 지중해란 영원한 여백이 아닐까? 그 여백을 둘러싼 지역, 그러니까 터스커니·그리스·알제리 등이 그런 여백을 떠올리게 하는 지역이리라. 그래서 복잡한 삶에서 벗어나 이들 지역으로 떠난 얘기를 다룬 책이 그처럼 많은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바로 프로방스다. 아비뇽, 엑상 프로방스, 몽펠리에 등의 지명만 들어도, 그 이름에 얽힌 고흐, 세잔느 등의 이름만 생각해도 그게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광고대행사 경영자 출신인 작가 피터 메일은 매년 2∼3주 정도 프로방스 지역을 여행할 때마다 "언젠가는 이곳에 와 살리라"고 다짐하곤 했다. 약물중독자가 된 심정으로 시골 마을의 상점과 포도밭이 있는 사진들을 바라보던 그의 가족은 결국 프로방스에 집을 사는 일을 '저질렀다'. 그렇게 해서 씌어진 이 책은 1991년 6월 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고 도시를 탈출해 전원으로 향하는 트렌드를 이끌었다.

이 책에는 낙천적인 프로방스 인들의 생활 관습, 그들의 음식, 프로방스 지역의 풍광 등이 그려졌다. 프로방스를 너무 사랑하는 이방인의 관점이라 긍정적인 모습만 다뤄진 것은 아닌가는 우려도 들지만, 어쨌든 읽는 내내 유쾌해지는 기분을 감출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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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선물》

■ 린드버그 장남 유괴사건의 전말

■피터 메일이 쓴 〈프로방스의 위험 요소들〉

■엘리자베쓰 엔라이트의 또다른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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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의 선물

■ 내안의 프로방스

■ 마법의 선물

■ 여름 이야기

■ 프로방스에서의 1년

(기분 좋은 인터넷서점-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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