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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모여들어 한탄하고 호가호위하고… 의연함이 미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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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호 11면

추석 이후 민심의 추이에 정치권은 민감하다. 대선 캠프는 지지율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후보들은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선거 전략을 수정한다. 때로는 소신도 바꾼다. 후보들의 정책이나 자질을 제대로 검증하기도 전에 여론조사부터 하는 선거풍속도. 연예인 인기투표와 뭐가 다른가.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⑫

물론 천기(天氣)와 지기(地氣) 못지않게 인기(人氣)는 중요하다. 천지인(天地人) 삼합(三合)의 기운이 따라야 가능하다는 게 대권이니까. 천기는 때요, 지기는 하다못해 논두렁 정기라도 받고 태어나야 한다는 명당 발복이며, 인기는 사람을 얻는 일이다. 그중 가장 얻기 어려운 게 인기다. 그렇지만 한 나라를 이끌어갈 국가리더십을 인기로 결정하는 건 정말 위험하다.

여론은 전문적일 수 없다. 군중심리가 작동하고 다분히 경향적이기 때문이다. 국가 리더십은 마땅히 시대정신을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지만 소신보다 여론의 눈치만 보면 정의는 지지율 밑에 깔린다. 그리고 그 결과는 5년 뒤 환멸로 되돌아온다.

세종대왕이 못다 편 꿈 누가 마저 끝낼까
백세를 훌쩍 넘긴 백두옹은 그야말로 산 조상이다. 자손들이 그를 찾아보는 게 성묘나 다름없다. 추석 때 백두옹은 여주 영릉에 성묘했다.
영릉은 세종대왕이 잠들어 계신 곳이다. 세종대왕이 곧 조선이다. 대왕이 없으면 조선도 없다 할 만큼 걸출한 위인이다. 세종의 리더십은 한마디로 지적 리더십이요, 창조적 리더십이다. 그 자신이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중세 동아시아의 글로벌 스탠더드였던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입수한 대왕은 세계 정신을 학습한다. 싱크탱크인 집현전을 통해 통합적 지식을 축적한다. 그를 바탕으로 과학문명을 꽃피운다. 천문관측기구들과 자동 물시계 자격루 발명, 한글 창제, 왕성한 출판문화로 중국 천하에서 조선 천하, 조선의 하늘을 열고자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때는 늘 사나웠다. 대왕이 못다 편 꿈은 600년 묵은 숙제가 되어 오늘 우리 앞에 놓였다. 누가 그 묵은 숙제를 이어서 마저 끝내겠는가. 적어도 대선 후보라면 그 정도의 포부가 있어야 한다.

대왕이시여! 영오(穎悟)하신 당신의 지혜를 후손들이 이어받게 하소서. 역에 이르되, ‘신이명지(神而明之)는 존호기인(存乎其人)이라’ 했습니다. 신묘하게 하여 밝히는 건 그 사람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대왕께옵서는 잘 아실 것이옵니다. 소 주역 중용에도 ‘기인존즉(其人存則) 기정거(其政擧)하고 기인망즉(其人亡則) 기정식(其政息)한다’ 했습니다. ‘그 사람’이 있으면 그 정치가 행해지고 ‘그 사람’이 없으면 그 정치가 종식된다는 것이지요. 박근혜·문재인·안철수, 이렇게 셋으로 압축된 후보 가운데 ‘그 사람’이 있기를 저는 바랍니다. 하지만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게 두렵습니다. 대왕께옵서는 굽어 살피소서.

영릉에서 돌아온 백두옹은 돋보기를 붙들고 책을 읽었다. 칼 폴라니, 햄릿을 읽다(당대). 여야 후보 모두 경제민주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의 고민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는 인간, 삶의 터전을 이루는 토지,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움직이는 화폐는 결코 상품화돼서는 안 된다고 봤다. 그것들이 시장 메커니즘에 편입될 때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악마의 맷돌’이 돌아간다. 월가에서 비롯된 금융위기는 ‘악마의 맷돌’이 작동해서다. 폴라니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을 지니고 다니며 애독했다고 한다. 백두옹이 주역을 손에서 놓지 않고 지니고 다니는 것과 같았다.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햄릿형 사유가 나은 역작이다.

시장경제 앞에서 불안한 존재, 햄릿의 망설임은 오늘날 인류의 문제다. 돈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면서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본질적인 가치들을 좀처럼 추구하지 못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혹시 찾아올지도 모를 대박을 꿈꾸며. 그렇게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쏟아져 나오는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존재한다. 인생은 인간들이 그렇게 놓치고 있는 기회다.

출판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후보는 없나
“할아버님, 올해는 정부가 정한 독서의 해라네요. 이 가을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책을 붙들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외손자며느리가 여름옷들을 옷장에 갈무리해 넣으며 말한다.
“핑계란다. 나처럼 핸드폰 꺼놓고 책 펴들면 그만이야.”
“습관이 된 할아버님과 제가 같아요?”
그러면서도 객쩍은 표정이다.

“이 늙은이 세 끼 꼬박꼬박 챙겨주느라 짬이 안 나 그렇지 뭐.”
백두옹은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힘 부친데 부러 나가서 밥을 사 먹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어요, 할아버님! 연휴 때 파주에서 출판사 하는 동창을 만났거든요. 올해 들어서 부쩍 책이 안 팔린대요. 정든 직원들을 내보내야 할 판이래요. 속상해하는데 도움이 못돼 미안했어요. 대선 후보 가운데 출판을 국가의 문화 인프라로 정하고 체계적으로 지원할 사람 없을까요? 4대 강 사업 같은 토목공사 비용의 1할만 들여도 넘칠 텐데요.”
“그건 별로 표가 안 되잖니.”
백두옹은 아이처럼 웃었다.

“안철수 후보라면 파주 출판도시에서 북 콘서트를 열 만한데요. 전문가들과 출판문화 육성책을 깊이 있게 토론한다면 교양 있는 중산층과 지식층을 사로잡을 거예요.”
“왜, 네가 좋아하는 문재인 후보를 놔두고?”
“그 일은 안 후보가 적격일 거 같아서요. 출판동네 혜택도 셋 중 제일 많이 봤고요.”
“누구든 그런 후보가 있다면 내가 업어서 데려가고 싶구나. 올해 한류의 경제효과가 무려 12조원이라잖니. 세계를 뒤흔든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더 웃돌 거라고도 하고. 이제부터는 고급 문화를 팔아야 하는데 그 기반이 곧 출판이야. 그런데 당장 표심 잡기에 바쁜 후보들은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구나. 네 말대로 독서의 해, 이 가을에 파주 출판도시를 안 찾아가면 언제 찾아가. 우리 사회에 권리와 책무를 다하는 교양 있는 중산층이 얼마나 되는지 의심스럽긴 하다만. 어쨌든 우리라도 가볼 거나?”

백두옹은 통일전망대도 들러볼 겸 북(Book)소리 축제 현장을 찾고 싶었다.
“일요일에 가볼까요? ‘한글 나들이 569’ 행사가 있답니다.”
“정말 그래 줄 수 있겠니?”
때마침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 행사가 있다니 더 반가웠다.

민심 하나로 모을 ‘지도리’가 있어야
사람들이 모이는 정치의 계절이다. 선거철에 이합집산은 매우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같은 소리가 호응하고 같은 기운이 서로 구하는 건 자연의 이치다. 정치는 조금 다르다. 소리와 기운이 서로 달라도 함께 모여서 의견을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르니까 연정(聯政)도 하는 것이다. 연정하자면 법을 손질해야 하고 상대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안 그러면 야합이 되고 오래 갈 수 없다.
백두옹은 췌(萃:
) 괘를 뽑았다. 위는 못(
), 아래는 땅(
)이다. 땅 위에 있는 못으로 물이 모이는 형상이다. 대선 후보 셋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기쁘게 모인다. 저마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사람이 모이면 혼란스럽고 크고 작은 이익다툼이 생기게 마련이다. 반드시 정신적 지주가 있어야 오합지졸이 되지 않는다.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지도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왕조시대에는 종묘(宗廟)에 제사하는 걸로 지도리를 삼았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국시(國是)가 그 역할을 한다. 국시는 국가 정책의 기본 방침이다. 한때 반공(反共)이 국시인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그럼 세계 10대 교역국 대한민국의 국시가 무엇인가? 통일인가? 홍익인간인가? 헷갈린다. 아니, 분명치가 않아서 답답하다. 지향점도 없이 무턱대고 발전하고 통합하잔다.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 전에 국시부터 정할 일이다.

췌괘 세 번째 효사에 ‘췌여차여(萃如嗟如)’ 하는 꼴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모여들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한탄하는 모양새다. 여섯 번째 효사는 더 가관이다. ‘재자체이(齎咨涕<6D1F>)’, 곧 탄식하고 눈물·콧물을 흘린다. 소인배(--)가 높은 지위를 탐내어 맨 위에서 떡하니 버티고 앉았으니 천하의 웃음거리다. 그야말로 호가호위하는 형국이다.

새누리당에서 박근혜 후보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중심 개념까지 의심받아 가며 역사관을 뒤바꾼 박근혜 후보의 남은 과제는 ‘친박’이다. 여전히 구태를 벗지 못하는 ‘친박’만 교체되면 문젯거리가 깔끔히 사라지는 셈이다. 그야말로 호랑이와 표범이 털갈이하듯 제대로 혁신하는 것.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이런 상황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강한 어조로 그걸 주문한 백두옹 자신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친박’ 인사들이 모두 나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박 후보만큼 혁신하면 된다.

민주당은 어떨까? ‘친노’의 퇴진과 혁신이 문제다. 이른바 ‘신진 사대부들’이 모인다는 무소속 안철수 후보 진영은 기성 정치권과의 차별화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게 가능하면 정치권은 분명 국민의 요구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이번 대선은 정책이 모두 비슷하다. 그래서 야권 단일화 이벤트 빼곤 따분하리만큼 밋밋하다. 이럴 때는 역시 시행할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모인 사람들을 잘 어거하고 조정자 역할을 원만히 해낼 수 있는 후보가 대인이다.

췌괘 다섯 번째 효사는 말한다. 모임에 바른 지위를 얻어 허물이 없으나 그래도 믿지 않거든 대의명분을 굳건히 붙들라고. 인기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지도자의 변함없는 준칙, 그것을 확인하면 주저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닫고 있던 속마음을 연다. 한없이 경망한 시대에 의연함이야말로 대인의 미덕이다.



김종록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밀리언셀러 『소설 풍수』와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바이칼』 등을 썼으며 중앙일보에 ‘붓다의 십자가’를 연재했다. 본지 객원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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