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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엔 매진" 부부가 자동차극장 가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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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삽화=김회룡 기자]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 1일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자유로자동차극장. 어둠이 내리자 자동차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파트 4층 높이(11m)의 대형 스크린 두 개가 등을 맞대고 서 있다. 자동차들은 선택한 영화에 따라 스크린 양쪽 상영관으로 흩어졌다. 경광봉을 든 안내요원은 키가 큰 승합차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맨 뒷줄로 안내했다. 세단들은 가운데부터 채워졌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상영하는 스크린 앞에 150대가량, ‘점쟁이들’ 앞에는 100여 대의 차량이 가득 찼다. 거의 만석이었다.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진 오후 7시, 차량 불빛이 모두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경기도 일산에 사는 김인석(51)씨 가족은 최근 두 차례 자동차극장을 찾았다. 극장행은 즐거운 나들이다. 가져온 치킨을 차 안 콘솔박스 위에 차려 놓고 매점에서 음료수와 쥐포도 사온다. 김씨와 부인은 운전석과 조수석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눕는다. 뒷좌석에 앉은 3남매가 화면을 잘 볼 수 있게 하는 이 가족의 노하우다. 매표소에서 가르쳐준 주파수를 맞추면 관람 준비 끝.

 “우와~ 멋지다.” “아빠, 방금 주인공이 뭐라고 했어요?”

 일반 극장이었으면 엄두도 못 낼 일. 가족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치킨을 뜯으며 영화를 봤다. 자동차극장이 최신 영화를 볼 수 있는 가족만의 홈시어터가 된 셈이다.

“일반 극장에서는 일렬로 앉아서 조용히 봐야 하잖아요. 이렇게 둘러앉아 오순도순 보면 영화가 훨씬 재미있습니다. 집 같은 편안한 분위기지만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최신 영화를 대형 스크린으로 보는 맛이 색달라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도 영화 보러 가자면 잘 따라나서고요.” 김씨의 자동차극장 예찬론이다. 그는 “다섯 명이 일반 극장에 갈 때의 절반 값으로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할인 효과’는 덤”이라고 말했다.

“주말에는 만차”. 불황이 자동차극장을 부활시켰다. 경기도 파주 자유로자동차극장에서 50여 가족이 영화를 보고 있다. [김경빈 기자]

 서울과 수도권에 있는 자동차극장 대부분은 승차 인원을 따지지 않고 차량 한 대당 평일엔 1만5000원, 주말엔 2만원을 받는다. 멀티플렉스 극장들은 금·토·일요일에 성인 9000원, 청소년 7000원이다. 이날 김씨 가족이 지불한 입장료는 2만원. 1인당 3000~4000원 꼴이다.

 자동차극장이 되살아나고 있다. 큰돈 들이지 않고, 멀리 가지 않으면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불황형 틈새 여가’로 떠올랐다. 자유로자동차극장 2개 상영관은 꽉 차면 300대 넘게 들어간다. 윤혜경 자유로자동차극장 실장은 “지난 여름 몇 차례 토요일 매진(만차)을 기록했는데, 최근 몇 년 새 없던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 극장은 올해 1~8월 입장 차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가량 늘었다. 같은 기간 유료회원(연회비 1만원) 수는 210명에서 300명으로 뛰었다. 다른 극장도 사정은 비슷하다. 서울 장충동에 있는 메가박스 남산자동차극장은 입장 차량이 지난해보다 15% 증가했다.

 자동차극장은 1980년대 후반 ‘마이카 시대’를 맞으면서 인기를 누렸다. 흔히 1인당 국민소득이 5000달러를 넘으면 마이카 시대가 시작된다고 한다. 한국은 89년 1인당 국민소득이 5000 달러가 됐고, 이후 빠른 속도로 자동차 시장이 커졌다. ‘자동차를 가진 사람만 갈 수 있는 곳’이었기에 자동차극장은 한때 ‘풍요한 소비’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께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동네마다 들어서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풍요한 소비’의 상징은 세련된 분위기에서 영화를 골라 볼 수 있는 멀티플렉스로 옮겨갔다.

 최근 자동차극장의 인기 부활은 우선 경제적인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윤 실장은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지만 한 차에 4~5명씩 타고 오는 가족 손님이 제법 많고, 심지어 봉고차에 10명 가까이 타고 오는 경우도 가끔 있다”고 말했다. 뒷좌석 사람들까지 화면을 보기 위해 갖가지 기지도 발휘된다.

 “봉고차를 가로로 주차하면 (정면으로 주차하는 것보다) 창문 수가 많아지잖아요. 창문에 서너 명이 앉고 나머지는 차 옆에 돗자리를 펴요. 이럴 땐 저희가 라디오도 빌려드려요.”

 탑승 인원이 아무리 많아도 차량 입장료는 같다. 극장엔 손해 아닐까. 윤 실장은 “두세 가족이 차 한 대로 올 경우 한 집에서 입장료를 내면 다른 집에선 간식과 음료수를 푸짐하게 사서 괜찮다”며 웃었다.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도 한몫한다. 경기도 용인시 보라동에 2010년 문을 연 용인자동차극장 이병래 대표는 “주변 아파트 단지에서 어린 자녀를 데리고 찾아오는 가족 관객이 전체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인천에 사는 김영완(28)·김효원(24)씨 부부는 최근 생후 65일 된 아들을 데리고 자유로자동차극장을 찾았다. 부인 김씨는 “출산과 육아 때문에 영화 관람은 꿈도 못 꾸며 살았는데, 어느 날 문득 ‘육아도 중요하지만 내 삶의 즐거움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씨 부부는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유아용품박람회에 들렀다가 분식집에서 오징어 덮밥과 냉면·김밥을 포장해 왔다. 차 안에서 저녁도 먹고, 영화도 보고, 아이에게 분유도 먹였다. 부부가 영화를 보는 동안 아들은 카시트에서 잠에 빠졌다.

 김병원(56·김포시 고촌읍)·이후남(48)씨 부부는 늦둥이 아들(6)을 데려왔다.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시간을 보낸 뒤 하루 나들이를 자동차극장에서 마무리했다. 이씨는 “우리는 젊은 부부들처럼 아이 데리고 사람 많은 놀이동산에 갈 체력이 안 된다”며 “멀리 가지 않고도 아이에게 바람을 쐬어 줄 수 있어 하루 나들이 코스로 딱 좋다”고 했다. 남편이 영화에 집중하는 사이 이씨는 트렁크에서 자전거를 꺼내 아들과 극장 주위를 돌았다.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온다. 친구 사이인 김형택(34·경기도 분당)씨 부부와 이진미(37·서울 종암동)씨 부부는 각각 ‘장모 닥스훈트’종 애완견을 데려왔다. 이씨는 “우리에게 강아지는 가족이나 마찬가지”라며 “가급적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자동차극장에 온다”고 말했다. 자유분방함이 좋아서 오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 중간중간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우는가 하면, 급한 전화를 받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이동이 불편한 장애인들도 단골 고객이다. 주차하고 내려서 걸어야 하는 불편함이 이곳에는 없기 때문이다.

 오명근 남산자동차극장 점장은 올해 ‘도둑들’ ‘건축학개론’ 등 한국 영화 흥행작이 많은 점이 자동차극장 인기에 한몫했다고 분석했다. 진원석 자유로자동차극장 대표는 “무엇보다 영화가 좋아야 자동차극장 관객도 늘어난다. 특히 여름에는 폭염 때문에 밤에 시원한 곳을 찾아 외출하는 사람이 늘어 더 붐볐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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