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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좌담 - 한·일 관계 개선방안을 찾아라

"침묵하는 일본인 다수는 과거사 반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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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 도쿄 포린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참석자들. 오른쪽부터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데라다 데루스케 전 주한일본대사, 김영희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 . 도쿄=김현기 특파원

<좌담 참여자>
데라다 데루스케 전 주한 일본대사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독도와 역사교과서 문제로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깊다. 노무현 대통령의 3.1절 발언에 이어 17일 정동영 국가안보회의(NSC) 의장이 대일 신 독트린을 선언한 데다 23일엔 노 대통령이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해 강력한 의지를 나타냈다. 이 같은 한국 정부의 대일 강경자세에 일본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한.일 관계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한.일 갈등이 북핵 문제 해결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중앙일보는 데라다 데루스케(寺田輝介.67) 전 주한 일본대사, 역사학자인 와다 하루키(和田春樹.67) 도쿄대 명예교수와 긴급 좌담을 했다. 독도와 역사교과서 문제 해결을 포함해 한.일 관계의 개선방안을 듣기 위해서다. 좌담은 25일 오후 도쿄(東京)의 포린프레스센터에서 1시간30분 동안 진행됐다.

▶김영희=노무현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내용을 잘 알고 계시겠죠. 시마네(島根)현의 독도의 날 제정과 왜곡된 역사교과서는 지방자치단체나 일부 국수주의자의 행동이라기보다 집권세력의 지원하에 진행된 '일본의 행위'라는 판단입니다. 일본과의 외교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말했어요.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두 분의 의견부터 좀.

▶와다=노 대통령의 발언은 표현의 수위가 너무 높아요. 일본 정부의 직접 지시로 역사교과서가 왜곡되고 지방자치단체가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표기)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는 지적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검정을 신청한 여러 개의 출판사 중에서 정부가 한 곳을 특별히 지지한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아요. 시마네현 의회의 행동은 일본인들의 역사에 대한 얕은 생각을 드러낸 것입니다.

▶데라다=노 대통령이 경제.문화교류를 지속하겠다고 강조한 것은 초기의 강한 톤에서 약간의 변화를 보인 것 같습니다. 초기의 발언엔 몇 가지 오해가 있었다고 봐요. 일본의 경우 중앙정부가 지자체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김=노 대통령의 이번 발언으로 일본 내 지한파의 입지가 약화될까요.

▶와다=한국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매우 큽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에 대한 신선감 때문일 겁니다. 다케시마 문제가 터지고 한국이 반발하는 것을 보면서 일본인들이 그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고 봅니다. 한국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진 않을 겁니다. 물론 한국이 일본과의 교류까지 중단하겠다고 하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데라다=한국의 지자체들이 그들의 상대 측과 교류를 단절하거나 연기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풀뿌리 교류를 통해 일본에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는 게 더 중요해요. 최근 한국의 신문과 방송엔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장기를 불태우고 시위하는 장면이 크게 보도되는데 모든 서울 시민이 그러는 것처럼 오해를 사 한류 열기가 영향을 받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김=일본 지자체들의 중앙정부에 대한 의존도를 생각하면 중앙정부가 시마네현 의회의 조례 제정을 저지할 수 있었던 아닙니까.

▶와다=시마네현은 오래전부터 '환일본해(동해의 일본식 표기) 협력'이라는 연구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러다 일본해라는 표현이 좋지 않다고 판단해 '동북아시아 협력'이란 표현으로 바꾸고, 2000년엔 현립대학에 북동아학과도 개설했어요. "북동아시아 국가들과 협력하는 게 우리의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한 거죠. 다케시마 문제로 한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거나 한국에 상처를 주려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마네현 어민들이 정부에 조업상의 어려움을 호소해 보상받으려는 생각으로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마네현은 호소다 히로유키(細田博之) 관방장관과 아오키 미키오(靑木幹雄) 자민당 참의원 간사장의 텃밭이기도 합니다. 호소다 장관 등이 마음만 먹었다면 다케시마의 날 제정을 막을 수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일본 정부는 사태 악화를 예상하지 못하고 안이하게 생각한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데라다=중앙정부의 힘으로 지자체를 움직이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중앙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건 실체가 없어요.

▶김=독도와 역사교과서 문제를 비교하면 그 동기와 심각성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와다=다케시마 문제가 훨씬 중요해요. 교과서 문제는 일부 단체의 문제지만 다케시마는 국가의 방침과 관련된 문제예요. 그런 점에서 한국이 교과서와 다케시마 문제를 하나로 묶어 거론하는 것은 맞지 않아요.

▶데라다=동감입니다. 교과서 문제는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어요. 요즘 젊은 세대의 인터넷 세계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2001년 교과서 파동 당시 한 여중생에게서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많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어요. 교과서가 유일한 지식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건 고루한 생각이에요"란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죠. 어느 시기가 되면 인터넷까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김=문제는 일본 집권당의 다수 세력이 공개적으로 '새역모'를 지지해 일본 전체가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와다=자민당의 주류였던 하시모토파는 국제적 감각이 있고 평화헌법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해왔던 세력인데 지금 붕괴된 상태예요. 지금 자민당의 전면에 등장한 세력은 과거 비주류였던 측입니다. 우익적이고 과거 전쟁을 찬양합니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에도 반대했어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도 한편으로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과 수교하겠다는, 어떻게 보면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이건 매우 위험한 상황입니다.

▶김=이른바 단카이(團塊)세대(50년대 출생의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고 전후 세대가 득세하는 것과 때를 같이해 사회당과 공산당이 몰락하고 자민당과 민주당이 독주하면서 일본 사회가 전반적으로 우경화하고 있는 게 아주 불길합니다.

▶데라다=한국은 일본의 정치를 망원경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어느 부분을 어떤 배율로 보느냐에 따라 일본의 모습이 달라지는데 망원경 배율이 너무 큰 것 같아요. 일본은 침묵하는 다수가 각 분야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나는 시민들의 상식과 건전한 판단을 믿습니다. 망원경을 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크기로 일본을 볼 필요가 있어요.

▶와다=사회당과 공산당 등 좌파는 자신감을 잃고 힘이 없어졌습니다. 시마네현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표결 때 민주당 2명은 반대했지만 공산당 의원은 반대하지 않고 기권했어요. 자유주의적인 중도의 힘은 매우 취약합니다. 반면 우파는 자신감이 넘치고 인터넷 등 새로운 방식으로 적극적인 운동을 펼치고 있어요. 그러나 침묵하는 다수가 있습니다. 과거를 반성하는 사람이 50%를 넘어요.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미화하고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은 일본 덕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일본인의 다수가 아니라는 걸 한국이 알아줬으면 합니다.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날 수 없어요. 일본이 우경화하면 한국 및 아시아와 함께 살아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우경화는 다수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없어요.

▶김=단카이 세대에 비하면 그 이후의 신세대들은 더욱 보수.우파적인 경향이 있다고 생각돼요.

▶데라다=그러나 한국이 세대 간의 단절이 더 커보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장래를 볼 때 두 나라의 같은 세대끼리의 교류가 중요합니다. 특히 2030세대가 대단히 중요해요.

▶김=고이즈미 총리는 북한을 두 번 방문하고 관계 개선을 적극 추진하는데 의회 쪽은 대북 송금과 북한 선박 입항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고이즈미는 대북정책에서 보수 우익의 반대와 견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와다=매우 어려운 입장에 있어요. 북한이 보내온 일본인 납치자의 유골 문제로 비판이 거셉니다. 고이즈미는 제재를 하지 않겠다고 북한에 약속했지만 당내의 강한 여론을 수습하기가 쉽지 않아요.

▶김=일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기를 갈망하는데 성공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한국이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와다=다른 나라들로부터 상임이사국이 돼 달라고 부탁을 받는다면 모를까 일본 스스로 하고 싶다고 나서는 것은 이상해요. 중요한 것은 과거에 일본에 피해를 본 아시아 국가들의 양해를 얻는 겁니다. 한국과 중국이 반대한다면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된다고 해도 큰 불행입니다. 아시아 지역 전체에 마이너스가 돼요. 다만 한국이 일본에 압력을 가하는 수단으로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김=한.일 간의 갈등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전망이 흐려질까 걱정입니다.

▶데라다=교과서와 다케시마는 양국 간 문제이고 북핵은 지역 문제입니다. 전자가 후자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게 일본 정부의 입장이라서 6자회담 협력에는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와다=일본이 역사 문제에 대해 확실한 인식을 하지 않는 것이 양국 관계의 근본적인 문제예요. 일본이 이 문제는 제쳐 두고 북한 핵 문제에서만 한국과 협력하자는 태도를 취하는 데 문제가 있어요.

▶김=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정리=예영준.김현기 도쿄 특파원

*** 데라다 데루스케 전 주한 대사는

2000년 2월∼2003년 1월의 재임 동안 역사교과서 파동, 월드컵 공동 개최를 직접 담당했다.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 대표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대사를 지냈다. 현재 포린프레스센터(FPC) 이사장이다. 지금도 차 안에서 한국어를 배울 만큼 한국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다.

***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1960년대 베트남 반전운동과 70∼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등 실천적 지식인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북한과 김일성 연구의 권위자다. 도쿄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뒤 줄곧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교수로 재직했다. 일본의 전후책임을 강조해 온 그는 2001년 우익 역사교과서 채택 저지운동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