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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아홉에도 새 직장 찾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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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내 청춘을 바친 회사가 이렇게 홀대하니 분노가 치민다. 회사 비리를 나만큼 아는 사람도 없다. 다 까발릴 수 있다."

대기업 부장으로 근무하다 얼마 전 퇴직한 A씨(48)의 거친 목소리다. 회사에서 밀려난 임직원의 통과의례 같은 분노로 언뜻 볼 수 있다. 하지만 정년까지 다 채우고 사장을 지낸 사람도 퇴직할 때 서운함을 감추지 않는 것을 보면 이 문제가 간단치 않다.

직장을 떠나야 할 때 누구나 크고 작은 분노를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상대적으로 더 심한 것은 곱씹어봐야 한다.

왜 그럴까?

우선 정규직 중심으로 노동시장 경직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번 나오면 제대로 된 직장을 다시 잡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사회 안전망이 잘 갖춰져 퇴직연금 등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퇴직하면 '경제적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퇴직자가 직장 후배에게 "끝까지 버텨라"며 조언하는 풍토는 그래서 생겼다.

노동부 통계를 보면 퇴직자는 한 해 150만 명(5인 이상 사업장, 지난해 기준). 더 좋은 직장을 잡거나 일하기 힘들어 그만두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마음의 준비 없이 '설마 나는…'하다가 밀려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자활을 돕는 사회적 인프라는 거의 없다.

라이프커리어 전략연구소의 오영훈 소장 말을 들어보자.

"퇴직한 뒤 새 직장을 찾지만 우리는 마흔만 넘으면 경력.능력과 상관없이 쓰겠다는 기업이 없다. 별수 없이 6개월 정도 백수로 지내면 최후 보루인 자산(퇴직금.저축 등)에 손을 대야 한다. 직장 그만둘 때보다 위기감이 더 크다. 이젠 음식점이라도 차려야겠다며 허둥댄다. 하지만 경험 없이 덤비기 때문에 상당수는 1~2년 사이 자산을 날린다. 이어 무력감에 빠지고, 가정 불화가 생기고, 심하면 이혼도 한다. 멀쩡한 사람이 가정 파탄범이 된다."

이런 주장이 과장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음식업 실태 하나만 들여다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전국 60만 개 음식점 중 지난해 휴.폐업, 명의변경한 곳이 40만 개(한국음식업중앙회 추산)가 넘는다. 퇴직자 등이 섣불리 식당을 차렸다가 투자금을 날린 숫자로 간주할 만한 대목이다.

특히 우리는 자산관리.재취업.창업을 도와 주는 전문 컨설턴트가 거의 없다.

미국의 경우 이런 전문 컨설턴트만 23만 명에 이른다. 노동시장 유연성이 큰 데다 퇴직자의 자활을 돕는 각종 프로그램이 잘 갖춰져 있다. 일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일할 수 있는 환경이다. 79세인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임기가 끝나면 새 직장을 찾을 것"이라고 농담할 수 있는 분위기다.

우리도 퇴직자의 자활을 돕는 프로그램을 서둘러 갖춰야 한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노동시장 유연성을 확보하는 게 가장 큰 열쇠일 수밖에 없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은 시장원리의 경쟁체제로 확 바뀌었다. 반면 노동 분야는 탈바꿈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기업들은 채용과 해고가 쉬운 비정규직을 많이 써 이젠 이들의 차별 대우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그렇다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단말마 같은 정책을 쓴다면 실타래만 더 엉키게 만드는 꼴이다.

결국 자동차회사 임직원들이 구조조정으로 대량 해고된다 해도 경력.능력을 인정받아 전자회사 등에 재취업할 수 있는 분위기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지금같이 퇴직당하면 식당을 차린 뒤 자칫 폐인이 되는 길밖에 없다면 개인.기업.국가 모두에 손실일 뿐이다.

김시래 산업부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