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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와 정치민주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89호 30면

정치권 특히 여야 대선주자들이 경제민주화를 강조하고 그 핵심 과제로 재벌개혁을 내세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재벌이 경쟁체제의 불공정성을 만들어내는 핵심세력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재벌은 산업화 과정에서 정경유착과 정부의 특혜를 받아 성장하였고, 그 막강한 경제력으로 은행 돈을 어렵지 않게 가져다 쓰고, 우수한 인력을 독차지하는 우월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심지어 재벌들은 청와대는 물론 공권력의 상징인 검찰과 국세청, 금융기관, 공정위 등에도 대단한 로비능력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언론기관에도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철이 되어 정치권이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 보호를 명분으로 재벌개혁을 외쳐대도 재벌들로서는 선거 결과를 주시하고 있다가 선거 후 집권세력에 줄을 잘 대면 별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재벌개혁의 핵심 과제들은 재벌 대기업들이 중소기업과의 거래에서 공정성을 유지하고 중소기업이나 영세 자영업자들이 잘하고 있는 영역을 잠식하지 않으며, 중소기업이 개발한 기술이나 훈련된 인력을 빼가지 않고, 자기 계열사끼리 일감 몰아주기나 부당한 내부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국회에서 법률을 만든다고 저절로 고쳐지는 것들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경쟁질서의 공정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법령은 지금도 얼마든지 있지만, 행정부가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공정성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재벌기업들의 불공정행위를 감시·감독하는 권력기관들이 청와대 등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깨끗하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기 어렵다. 검찰이나 국세청이 가끔씩 재벌 손보기를 하지만 경종을 울리는 정도에 불과할 뿐 재벌들의 행태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권력기관들이 청와대 등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는 이유는 무엇인가? 권력기관의 인사권을 청와대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인사검증시스템은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불합리하다. 경제각료를 임명할 때 경제수석의 의견을 별로 듣지 않고, 대통령의 정치적 측근들이 좌지우지하는 것이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몇 달 후에 태어날 다음 정권이 똑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으려면 대통령의 인사권 독점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절차법을 제정해야 한다. 청와대는 장·차관급 외에는 공직 인사에 지나치게 간여하지 말고 각 부처나 공공기관의 내부인사권은 기관장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러한 대통령의 인사권 제한이 정치개혁의 핵심과제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국회와 인사권을 나누어 갖기 위해선 주요 권력기관의 수장은 현행 청문회 방식을 임명동의 방식으로 고쳐야 하고, 재외공관 대사, 군 장성, 국영기업 사장 등의 인사청문회도 검토해볼 만하다. 제왕적 대통령제하에서 재벌과 같은 막강한 힘을 가진 세력의 행태를 고치는 경제민주화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최고권력은 최고경제력과 떼어놓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이 이뤄질 때까지 대통령의 인사독점권을 제한하는 것이 정치민주화의 시급한 과제이고, 재벌의 불공정한 행태를 바로잡는 것도 공권력 행사의 정치적 중립성 확보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무소속 안철수 후보 모두 경제민주화를 역설하고 있다. 세 후보는 경제민주화의 핵심인 재벌개혁을 하자는 기본취지가 재벌의 확장과 투자를 억제하자는 것인지, 재벌의 불공정한 행태를 바로잡자는 것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재벌의 경쟁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제도를 고치는 것보다 국가공권력 행사의 공정성 확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대통령의 인사권 독점구조부터 스스로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는지 밝혀야 할 것이다.

공권력을 행사할 기관들의 주요 보직 인사가 선거 때 협력한 사람들이나 정치권에 줄을 잘 대는 사람 위주로 왜곡되어 왔기 때문에 정경유착의 뿌리가 뽑히지 않는 것이다. 대선 후보들은 미국의 경우처럼 정치적 고려가 필요한 자리에 대해선 미리 ‘인선(人選)’ 공약을 한 다음 인사의 투명성을 확립하는 것도 정치민주화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경제민주화로 가는 길은 정치민주화의 길을 거치지 않고는 열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이 이제 정치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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