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 안주인 김은영씨와 며느리 윤은화씨

중앙일보

입력

사랑방에는 간송 물건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곳에서 김은영 매듭장(왼쪽)과 며느리 윤은화씨가 올 추석을 준비하기 위해 백자 제기를 닦고 있다.

김은영(70) 매듭장이 우리 앞에 낡은 수첩 하나를 펼쳐 보였다. 결혼 선물로 받았다니 46년도 족히 넘은 물건이다. 행여 찢어질까 그는 조심스레 책장을 넘긴다. 빨간 수첩 맨 첫장에는 어떤 기록이 담겨 있을까. 마침내 공개된 첫 페이지. 빛 바랜 사진 한 장에는 다름아닌 간송 전형필의 제사상이 놓여있었다. 며느리 윤은화(34)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상차림’이다. 10층 쯤괘놓은 밤·대추·과일에, 집에서 직접 튀긴 약과, 천장에 쳐놓은 앙장까지. 으리으리한 차림은 한 눈에 잘 담기지도 않는다. 성북동 종갓집의 이 요리비책은 오래 전 책 한 권으로 나왔을 정도다. 김 여사는 “어느 집안에선가는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서울지방 제사의 옛 모습 그대로를 지켜나가고 싶다”고 전한다. 일년에 두 번 열리는 전시만큼이나 특별한 간송미술관의 추석, 집안의 안주인 김 여사와 그녀의 며느리 윤씨를 통해 들었다.

대를 넘기며 횟수는 줄였어도 음식 차림은 불변

서울 성북동 주택가 깊숙이 자리잡은 간송미술관. 사택은 ‘외부인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간판 너머에 자리 잡았다. 이곳에는 간송의 맏아들 전성우 선생과 맏며느리 김은영 여사가 터를 잡았다. 집 앞의 너른 뜰에서 이들 부부의 희수연과 칠순 잔치, 네 자녀의 약혼식과 결혼 축하 연회를 치렀다. 부부가 결혼하기 1년 전 이 집이 완공됐으니, 집과 부부는 역사를 함께한 셈이다. 김여사가 집안의 제사를 물려받은 것도 그 무렵이다. 약혼식을 갓 마친 그를 시어머니가 제사에 불렀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시어머니의 제사 시연이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3개월이나 됐을까요?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 저희 집으로 제기를 보내셨어요. ‘나 혼자 43년을 했으니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하겠다’는 선언이셨죠. 제가 갖고 있는 건 약혼 기간에 받아 적은 메모가 전부였는데, 눈 앞이 깜깜했지요(웃음).”

그래도 다행인 건 일년에 17번이나 지내던 집안의 제사가 김 여사에게 넘어오면서 2대 할아버지 때까지로 줄어든 것이다. 그리고 그도 며느리를 보면서 간송과 시어머니 제사, 설, 추석, 한식으로 횟수를 줄였다. 하지만 횟수는 줄일지언정 제사상에 올라오는 음식은 간소화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시어머니가 지내시던 그대로 차림을 재현한다. 쑥을 캐 편을 찌고, 다식도 집에서 만든다. 서울 방학동 묘소에서 차례를 지내는 추석은 마른 음식으로만 상을 올릴 수 있어 조금 수월한 편이다.

김 여사는 며느리 윤씨가 이 모든 과정에 호기심을 갖고 배우려고 나서줘 참 고맙다고 한다. 윤씨는 “이렇게 제사 지내는 집이 없거든요. 저도 처음에 막 신기해서 사진 찍어 올리고 그랬어요. 싫고 좋고를 떠나서 어차피 해야 하는 거니까 즐겁게 하려고요”라며 웃는다. 40여 년 전의 김 여사도 같은 생각을 했겠구나 싶을 정도로 윤씨의 마음이 김 여사와 닮아있다.

오랜 시간 명절을 치른 김 여사에게 남다른 하소연을 듣고 싶어 물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13호 매듭장으로서, 지난해부터는 서울시무형문화재공예관의 대표까지 맡게 된 김 여사는 요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다. 더욱이 이번 추석은 이달 26일부터 청아갤러리에서 열리는 무형문화재 회원전과 겹쳐 더욱 벅찰 수 있다. 하지만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46년간 늘 준비해온 게 있으니깐 제사가 특별히 어렵단 생각은 해본 적 없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종갓집 맏며느리의 내공이 묻어나는 대답이다.

맏며느리로서 46년을 지내면서 김 여사 슬하의 네 아이는 이제 손주를 안겨줄 정도로 장성했다. 김 여사는 딱 일흔이 되면 며느리에게 모든 걸 물려주려고 마음 먹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게 잘 안 된다는 이야기다. “며느리가 임신한 게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그래서 ‘움직일 수 있는 한 내가 하자’ 그렇게 마음 굳혀가고 있어요” 라며 엷은 미소를 짓는다.

김 여사는 “요새 새댁들이 제사 상차림을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아무리 바빠도 한 두 가지에는 정성을 들여야 하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의견을 내놨다. “시어머님께서는 ‘너희도 죽으면 이렇게 예를 받을 산 조상이다’하면서 음식이 따끈할 때 입에 넣어 주시곤 하셨어요. 우리가 보통 식탁을 차릴 때도 밥부터 반찬, 국까지 모두 사다가 먹진 않잖아요. 하물며 일년에 몇 번 뿌리를 생각하는 제사인데, 예를 다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추석은 특히 빙 둘러 앉아 송편을 빚으며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좋은 기회라는 게 김 여사의 이야기다. 매주 주말 슬하의 4남매와 함께 저녁 외식을 하는 김 여사부부지만, 추석과 같은 명절은 또 나름대로 설레게 기다려진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함께 살 비비며 만들고 차리는 음식, 그 때문이 아닐까.

<한다혜 기자 blushe@joongang.co.kr 사진="황정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