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가슴 속에 살아 5·18 의미를 깨우쳐주시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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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강성순부인과 김준석아들이 광주 국립 5.18묘역에서 헌화 하고 있다.광주=양광삼 기자

"아버지,이젠 편히 잠드세요.어머니는 제가 잘 모실게요."

5.18민중항쟁 25주년 기념 추모제가 열린 17일 오전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묘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한달여만에 아버지를 잃은 김준석(25.광주 신원전자)씨는 어머니 강성순(52)씨의 손을 꼭 잡고 다짐했다.

어머니 강씨는 "그래,에미는 우리 준석이하고 오래 오래 살아야겠다"고 말했다.

아버지 고 김복만씨는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부상자들을 후송하던 중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버스 기사였던 그는 당시 28살로 부인과 두 살배기 큰 아들 일석,갓난아기 준석을 남겼다.

강씨는 큰 아들을 안고 둘째 아들을 들쳐업은 채 도청 앞 상무관에서 싸늘한 남편의 주검을 확인했다.

이후 강씨는 매달 두 아들을 데리고 남편이 묻혀있는 '망월동 묘지'를 찾았다.

버스도 다니지 않는 진흙탕길을 걸을라치면 아이들은 서로 업어달라며 떼를 쓰기도 했다.

[패러디] 오월광주, 5.18이 궁금하다고?

한 아이가 울면 다른 애가 따라 울고 가족이 서로 부둥켜 안고 울음바다를 이뤘다.

'5.18진상규명'을 외치며 거리로 나설 때도 어머니는 두 아들과 함께 했다. 어린 준석은 시위대의 아저씨들만 보면 '아빠'라고 불러 어머니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준석은 초등학교 시절에도 어머니를 따라 시위현장에 있었다.

바로 옆에서 최루탄이 터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5.18민주화운동의 희생자인 아버지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알게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5.18유족회에서 펴낸 '5.18비망록'에 아버지의 의로운 죽음이 뚜렷이 기록된 것을 접하고 '어머니의 싸움'을 비로소 이해했다.

"아버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어요. 한번만이라도 아버지를 보고 아빠라고 불러보고 싶었으니까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심정은 어떨까하고 헤아려보고 견뎌냈습니다."

어머니가 93~94년 170여일간 서울 명동성당에서 5.18유족회원들과 함께 '5.18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느라 집을 비웠지만 한눈 팔지 않고 공부에 매달렸다.

고교시절 카센터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보태면서도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다.

2003년 8월 군 제대후 경기도 평택시에 있는 자동차 부품회사의 사무관리직으로 일하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기위해 광주로 와 지난해 10월 신원전자의 생산직 사원으로 들어갔다.형은 고교 3년때 취업해 현재 기아자동차 수출부(경기도 평택시)에서 9년째 근무하고있다.지난해 말 동생에게 "어머니를 잘 모시고 다니라"며 승용차를 사 보냈다.

준석씨는 오전 7시쯤 출근해 자재관리.부품조립 등 일을 하고 오후 7시 퇴근하는 고된 일과 속에서도 하루 5~6번 어머니와 통화한다.

10여일 전 쯤 어머니에게 여자친구를 데려가 인사시키기도 했다. 신세대답게 컴퓨터를 잘하고,주말이면 축구를 즐겨한다. 그는 "이젠 당당히 아버지를 말할 수 있다"며 "늘 가슴 속에 살아 5.18의 의미를 깨우치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10년째 5.18민주유공자유족회 재무 담당으로 살림살이를 도맡고 있다. 매년 추모제를 치르고 나면 어머니는 훌쭉한 몸이 2~3㎏나 빠진다. 지난해부터 어머니가 추모제에 올릴 제례음식을 장만하느라 시장을 볼 때 앞장서 도와드리고 있다.

5.18 유족회원들은 "그 때 갓난아이가 벌써 이만큼 컸나"하며 모두 다 반긴다.

어머니는 97년 국립 5.18묘지가 들어설 때 묘비를 새로 썼다.

"당신의 젊은 죽음이 헛되지 않고 민주화 성지에 모시게 된 것을 아들 일석.준석과 함께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강씨는 "혹독한 시절에도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아들들이었다"며 "반듯하게 자라줘 고마울 따름이다"고 말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 154명의 자녀들은 50여명에 이르고,이 중 80년생은 준석을 포함 3명으로 알려졌다.

광주=천창환 기자 <chuncw@joongang.co.kr>
사진=양광삼 기자 <yks23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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