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 느꼈다" 돌변한 北, 이유 알고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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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북한이 12일 우리 정부와 벌여 온 대북 수해지원 협의를 돌연 중단하고, 우리 측의 지원을 거부했다. 북한은 이날 오후 판문점 적십자 채널을 통한 통지문에서 우리 정부가 11일 밀가루를 포함한 대북지원 품목·수량과 지원계획을 통보한 데 대해 “그러한 지원은 필요치 않다”고 알려왔다. 이어 오후 9시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큰물 피해와 관련, 괴뢰 당국에 그 어떤 기대한 것도 없지만 이번에 더욱 환멸을 느꼈다”고 비난했다. 또 “보잘것없는 얼마간의 물자를 내들며 모독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북측에 통보한 품목은 밀가루 1만t, 라면 300만 개, 의약품과 기타 구호물품 등 100억원어치다. 통일부 당국자는 “수해를 입어 힘들어하는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무산돼 안타깝다”며 “북한 당국이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거부한 건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거부입장 표명은 지난해 수해지원 품목을 놓고 벌인 기싸움의 연장선이란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당시 정부는 영·유아용 영양식과 라면·초코파이 등 50억원어치의 물품을 준비했다. 하지만 북한은 “쌀과 시멘트를 통 크게 지원해 달라”고 버텨 무산됐다. 이번에 북한은 남측의 지원 제안을 일주일 만인 10일 수용하면서도 지원리스트를 먼저 들여다보겠다는 수순으로 나왔다. 자신들이 고집한 쌀·시멘트가 우선 지원품목에 빠져 있자 초반에 협상판을 접어 버렸다. 당국자는 “긴급구호 성격의 밀가루 등을 지원한 뒤 북측이 요구하는 품목도 추가 협의하려 했는데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북한은 자기들 뜻이 존중되지 않았다고 비난한 것으로 당국자는 전했다.

 이를 두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강경입장을 대북지원 거부로 표현한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정은은 최근 평양의 가정집을 방문해 “정세가 너무 긴장돼 전선을 한 바퀴 빙 돌고 왔다”(9일 조선중앙방송)고 말하는 등 대남 강경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수해지원 협의를 벌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관영매체를 동원해 이명박 대통령을 극렬히 비난한 것은 처음부터 지원을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다는 의미란 얘기도 나온다. 12일 밤 조선중앙방송은 “이명박 패당과는 말이 통하지 않으며 최후의 결산만이 선택으로 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거부로 인해 수해지원 협의를 계기로 경색된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정부 구상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5개월 남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자신들이 선호하는 차기 정부를 만들려고 12월 대선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데 집중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지난 5월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도록 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김정은이 쌀·시멘트를 챙기기 위해 정작 수해주민들이 필요한 물품을 거부한 셈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국제사회에는 소량지원도 구걸하면서 우리의 대규모 지원은 외면하는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수해현장을 방문하지 않았고, 9일 끝내려던 평양 아리랑축전을 이달 말까지로 연장했다.

 우리 정부의 전략과 대응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지난달 초 이산상봉을 제안했다 하루 만에 퇴짜를 맞았는데도 다시 한 달 만에 덜컥 수해지원 카드를 꺼낸 건 성급했다는 얘기다. 북한이 “품목과 수량을 알려달라”고 한 숨은 의도를 간파해 당국 간 테이블에 북한을 끌어 앉힐 묘수를 짰어야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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