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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대학생, 영어토론 中압도' 해외 석학들 깜짝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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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과기대의 강의실. 모든 강의는 외국계 교수진에 의해 영어로 진행된다. [사진 이승률 부총장]

평양 시내 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가르친다면? 통일 후 한반도의 얘기가 아니다. 지금 현재, 북한의 유일한 사립대이자 국제대학인 평양과학기술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미국 하버드대 출신 교수가 북한 학생에게 영어로 MBA 강의를 한다. 이번 학기엔 글로벌 금융위기와 국제정세를 가르치는 국제금융론 강의가 인기라고 한다. 북한 청년들이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초상화 사진이 걸린 강의실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공부하고 있는 셈이다. 대학원생 70명, 학부생 300명에게 ▶정보통신 ▶산업경영(MBA) ▶농업·식품공학 분야를 가르친다.

이 대학 사령탑은 한국계 미국 시민권자인 김진경 총장과 박찬모 전 포스텍(포항공대) 명예총장이 맡았다. 한국인 이승률(63·사진) 부총장은 대외업무를 총괄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지와 한국 통일부의 승인으로 탄생한 남북합작 대학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평양과기대를 두고 워싱턴포스트는 “평양의 고립된 젊은이들에게 국제화 기회를 열어주는 모험”이라고 소개했다. 이달 16일이면 이 ‘모험’이 시작된 지 3년이다. 곡절 많았던 개교 과정에서 산파역을 맡은 이승률 부총장을 서울 양재동의 개인사무실에서 만났다. 이 부총장은 먼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20명 남짓한 평양과기대 학생이 체육대회 후 외국인 교수들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다. 힘차게 승리의 ‘V’자를 그려 보이는 학생부터 장난스럽게 혀를 내민 학생까지 한국 여느 대학생과 다를 바 없이 활기차다. 이 부총장은 “식사시간에도 짬을 내서 교수들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을 만큼 열정적”이라고 전했다.

-시장경제 강의에 대한 학생들 반응은.
“굉장히 뜨겁다. 원래 다른 분야 전공으로 들어왔다가 국제금융을 듣는 학생 수가 늘어나고 있다. 가르치는 내용이나 영어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아이들의 변화 속도에 외국인 교수들도 감탄한다. 교내에서만 통용되는 10달러 신용카드로 도서관·식당을 이용하는 시장경제 시스템에도 잘 적응한다.”

-북한 당국이 MBA 강의를 받아들인 이유는.
“북한 교육성도 망설였다. 처음엔 북한 교수들에게 내용을 전수해주면 자기들이 사회주의 체제에 맞게 가르치는 방식으로 하자고 얘기했다. 그런데 갑자기 교육성 관계자가 ‘장군님께서 미국에서 공부하는 그대로 MBA를 가르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하버드대 교수가 가져온 원서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김 위원장은 서방의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핵심 이론을 그대로 배워서 자기네 경제개발에 적용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평양시 낙랑구역 캠퍼스 부지는 우리로 따지면 원래 수도방위사령부에 해당하는 군부대가 있던 자리다. 이 터도 김 위원장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라’고 지시해서 받은 거다. 지난해 북한의 모든 대학생에게 강제 휴학령이 내려졌을 때도 평양과기대는 면제 특권을 누렸다.”

-학생들 수준은.
“학부생은 김책공대 등에 재학하는 성적우수자 중에서 뽑고 대학원생은 북한 교육성이 엄선한 수재들이다. 지난여름 우리 학생들이 중국에서 베이징대 학생들과 영어 토론을 벌였다. 처음엔 베이징의 개발된 모습에 주눅들어 하더니 막상 토론이 시작되자 중국 측을 압도해버렸다. 지난해 10월엔 평양과기대에서 개최한 첫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학생들이 먼저 손을 들고 유창한 영어로 ‘2회부터는 우리가 낸 연구 성과를 직접 발표하게 해달라’고 요구해서 여기에 참여한 해외 석학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지난 6월엔 3명의 학생이 영국 웨스트민스터대 유학생으로 선발됐다. 미국 코넬대, 싱가포르국립대(SNU)에도 유학 가능성을 타진 중이다.”

이 부총장은 원래 건설업으로 잔뼈가 굵은 사업가 출신이다. 40대 초까지만 해도 교육 분야, 더군다나 북한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1990년 중국 내 골프장 건설계획을 세우고 양상쿤(楊尙昆) 당시 국가주석의 아들을 만나러 갔던 자리에서 인생 항로가 바뀌었다. 합석했던 김진경 총장이 양 주석의 아들에게 “사재를 털어 조선족을 위한 기술전문대학을 세우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부탁을 꺼내는 것을 보면서다. 김 총장은 조선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을 세워 중국 발전에도 필수적인 과학기술을 가르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 부총장은 “그 얘기를 들으며 마음이 굉장히 찔리더라”고 했다. 그 길로 골프장 사업을 접고 김 총장과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92년 9월 연변과학기술대학을 개교했다. 그리고 20년, 연변과기대는 취업률 100%를 자랑한다. 중국 정부가 선정한 100대 중점 대학으로도 성장했다.

연변과기대의 성공을 유심히 지켜본 이가 김정일 위원장이다. 2001년 2월엔 “사회주의 체제에서 성공한 연변과기대 같은 대학을 평양에도 세워 달라”고 요청해 왔다. 김 위원장이 상하이 푸둥지구를 둘러보며 “천지개벽”이라고 말한 지 약 한달 만이다. 한국 통일부에서 곧 승인을 받았지만 개교까지의 길은 험했다. 430억원에 달한 건설비 모금도 어려웠지만 남북관계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9년 건물 17동을 짓고 준공식을 마쳤다. 그러나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 11월 연평도 포격사건이 잇따라 터졌다. 평양과기대는 ‘남북합작 교육특구’란 목표를 안고 출발했지만 요즘엔 외국 국적의 한국계 혹은 외국인 교수진만 가르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평양과기대가 북한 좋은 일만 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여전하다.

-평양과기대는 결국 북한 체제 지속을 위한 도구일뿐더러 ‘해커 양성소’가 될 수 있다는 비난을 받는데.
“평양과기대의 목표는 북한의 국제화를 위해 영어와 기초기술, 실용학문을 가르쳐 통일의 초석이 될 기술관료를 육성하는 것이다. 중국처럼 정치적 리더십이 뛰어난 기술관료를 길러 북한 인프라를 발전시켜야 남북통일도 빨라진다. 북한은 개혁·개방이란 말에는 민감하지만 국제화라는 개념엔 관심이 상당하다. 이런 흐름을 읽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르치는 기술은 군사기술과도 전혀 무관하다. 미사일 쏘고 해킹하는 데 평양과기대가 일조한다는 건 오해다. 정말 답답하다.”

-김정은 체제에서 새롭게 감지되는 변화는.
“김정은 부부와 핵심 실세들은 유학파라서 누구보다 국제화의 중요성을 잘 안다.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선군(先軍) 아닌 선경(先經)으로 갈 수밖에 없을 거다. 경제를 살리지 않고선 김정은 자신이 위험해진다. 변화의 조짐은 틀림없이 느껴진다는 게 현장 분위기다. 천안함·연평도와 같은 군사 도발엔 강경 대처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북한 내부의 미묘한 새로운 변화를 읽고 북한을 국제사회 일원으로 자연스레 이끌어내야 하지 않겠나. 이명박 정부도 남은 임기 중 민간 차원 교류엔 숨통을 터줄 필요가 있다. 북한이 자존감을 회복하는 길은 핵이 아니라 교육을 통한 진정한 국제화와 인프라 구축이다. 그런 초석을 쌓자는 게 평양과기대의 목표다.”

전수진 기자 sujin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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