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법원 배상 판결에 억장 무너질 코오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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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호 02면

이쯤 되니 “너무하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한국 기업들에 대한 미국 동종업체의 법적인 공세, 그리고 이에 맞장구치는 듯한 미 법원의 태도가 그렇다는 얘기다. 특히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나온 코오롱의 1조원 배상 판결에 많은 사람이 아연실색한다. 삼성전자-애플 특허 소송에서 캘리포니아 법원이 실리콘밸리 토착기업인 애플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준 지 일주일도 채 안 돼 버지니아 법원이 코오롱에 1조원의 배상금을 물렸다. 원고는 역시 이 고장 토착 화학업체 듀폰이다. 코오롱인더스트리가 2006년부터 생산·판매한 특수화학섬유 아라미드 제품이 듀폰의 독자 기술을 무단 도용했다는 것이다.

삼성-애플 싸움이 특허권 시비라면 코오롱-듀폰 싸움은 영업비밀이 관건이다. 널리 공개되는 특허권의 침해 사건보다 영업비밀 침해 사건은 은밀하고 모호한 구석이 많다. 가령 코카콜라의 핵심 경쟁력인 콜라 원액 배합비율은 특허권이 아니라 영업비밀보호법의 대상이다. 이런 복잡한 구조 탓에 코오롱 입장에선 삼성-애플 소송보다 더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을 받았다. 미국 시장에서 아라미드 매출은 30억원에 불과한데, 그것의 300배가 넘는 배상액이 선고된 때문이다. 이에 대해 코오롱 측은 ‘30년간 공들여 개발한 특허기술’이라고 항변한다.

아무리 미국이 거액의 징벌적 배상을 매기는 나라라고 하지만, 1조원 배상에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물건을 팔지 말라는 판매금지 조치는 이례적이다. 미 법원 안팎의 상궤를 벗어난 정황들은 판결의 공정성을 의심케 만든다. 담당 판사의 듀폰 관련성 소문부터 배심원단의 어정쩡한 구성, 아마추어적 평결 과정에 이르기까지 뒷말이 무성하다.

미국은 일찍이 강력한 지적재산권 보호 전통을 확립한 덕분에 정보기술(IT)과 인터넷 등 창의성에 기반한 첨단 산업의 선두주자가 됐다. 버락 오바마 정부도 일자리 창출의 핵심 국가전략으로 첨단 지재권 강화를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고 미 법원들이 애국주의·보호주의 냄새가 물씬 나는 재판 흐름에 편승할 경우 “자국 기업과 일자리 지키기의 첨병으로 나섰다”는 의혹을 초래할 수 있다.

앞으로 미국 기업들이 글로벌 한국 기업의 시장 확대를 저지하는 수단으로 지재권을 최대한 활용하는 사례는 급증할 조짐이다. 한국도 생산 공정이나 생산성 관련 특허 위주에서 벗어나 원천특허 개발에 힘써야 애플·듀폰과 같은 기술 선도자가 될 수 있다. 그게 어렵다면 중국처럼 원천특허를 열심히 사들이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 아울러 잇따르는 지재권 공세나 ‘특허 괴물’이라는 복병에 맞서려면 민·관 합동의 핫라인을 통해 정보력과 협상력을 키워야 한다. ‘글로벌 강자’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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